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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Oct 05. 2022

내 뿌리의 쓴 맛

- 아직도 살아있거든.

비닐하우스


독특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평범하고 평탄하게 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내가 선택한 내 삶이 왜 이렇게 너저분한지 왜 그렇게 된 건지 생각하게 된다. 현재의 삶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어린 시절부터 들여다봐야 할까?

문제점이라고 하자니 정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도 없다. 나는 또 교사도 꽃집도  아닌 다른 길을 찾으니 말이다. 사실 나는 자라온 환경보다는 개인의 사고방식과 가치관, 가지고 태어난 성격 등이 더 현재의 삶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형제도 판이하게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경우도 많고 내가 살아온 시간은 내 성격이 특이해서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뿌리가 만든 열매는 내 쓴 뿌리를 품고 있기에.


꽤나 가난한 집에 4남매 중 셋째였다. 나의 어느 것 하나 가난이 드러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가난했다. 가난한 사람은 안다. 정말 가난해서 필요함에도 양말 한 짝도 못 사는 것과 그것에 연연하지 않아서 또는 잊어버렸거나 무심해서 없는 것은 그 풍기는 기운이 다르다. 영화 기생충에서 부잣집 사모님을 속일 수 없었던 그 곰팡이 냄새. 뼛속까지 가난은 침투해있고 그 안에서 나는 꼬박 이십사 년을 살았다.

몇 살 때부터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우리 집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뒤 비닐하우스였다. 학교 뒤편은 산이었고 그 산 중턱쯤 누가 만들어 놓았는지 모를 그것이 우리 집이었다. 그전에 2학년쯤 때까지 살던 동네는 그래도 동네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주인집이 사는 방 안쪽에서 셋방살이를 했지만 방이 있고 부엌이 있고 공동으로 썼던 화장실이 있었다. 비만 오면 홍수가 나긴 했지만 불행이나 가난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었다. 아니 그걸 느끼기엔 너무 어렸겠지. 그러다 무슨 이유였는지 이사 간 곳이 비닐하우스였다. 밖에서 보면 원기둥을 세로로 뚝 잘라서 엎어놓은 진짜 비닐하우스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입구엔 부엌, 조금 더 들어가면 작은방, 그 안엔 큰방이 있었다. 집안에 화장실이 있을 리 만무했고 걸어서 족히 3분은 가야 누가 만들어 놨는지 모를 푸세식 화장실이 나무판자에 노란 천막을 두르고 서 있었다. 그랬기에 작은 일은 부엌에서, 큰 일은 푸세식 화장실을 이용했었다. 난방은 되지 않아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났고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던 세상 그 누구와 연결된 것인지 모를 작은 산소는 우리의 미끄럼틀이며 뒷동산이었다.


"너희 집, 이불 있어?"


학교 복도 측 창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던 우리 집은 꼬질한 나와 잘 어울렸다. 철없고 눈치 없던 나는 친구들에게  "저기 우리 집이다~"라며 큰 소리로 떠들어댔고 그런 나를 보며 한 친구가 물었다. 너, 이불 있어?

중요한 건 이게 모두 내가 어린 시절, 그러니까 약 30년 전, 1990년대 경기도 성남에서 있던 일이었다는 것이다. 약 10분 떨어진 곳에서 분당 신도시가 한참 건설 중이었고 운 좋게도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학교급식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급식을 제공해주었다. 전쟁통도 60,70년대도 아닌 90년대에 비닐하우스에서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던 나는 친구의 그 질문이 그 당시에는 이상했지만 지금은 아프다. 아니, 그때도 아팠으니 기억하고 있나 보다. 심지어 나는 대낮에 학교에 가 있는 딸을 비닐하우스에 난 창문으로 바라보며 메리야스만 입고 술에 취해 손을 흔드는 아빠에게 반갑게 같이 손을 흔들어주며 또 얘기했다. "어! 아빠다!" 가만있었어도 모양새가 나쁘지 않았을 텐데. 그때 아빠의 모습은 지금도 나를 후벼 판다. 늘 술에 절어있는 아빠. 그런 아빠를 자랑스럽게 소개한 나. 그런 나의 아빠가 불편한 그 친구. 아빠는 내가 반가워서 인사했을까. 아님, 창피하지만 무릅쓴 걸까.  창피했지만 딸을 위해 무릅쓴 그날의 그를 바래본다.


그래. 그녀였군.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내가 지독하게 가엽다. 당장 도망가고 싶었을 엄마가 어느 날 진짜 며칠을 안 들어왔을 때, 키우던 강아지 새끼가 아파서 데리고 잤는데 방 안 공기가 너무 차가워서 얼어 죽었을 때, 집으로 가는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에서 어떤 아저씨가 날 불러서 자기 무릎에 앉히고 날 만졌을 때 모두 나는 너무 작고 약했다. 나에게 주어진 그 집과 그 상황이 불행인지 몰랐고 그 안에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줄 몰랐다. 사실 나는 그런 것보다 매일 밤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집에 안 들어오면 어쩌지 하는 걱정으로 깜깜한 밤에 집 밖에 쪼그리고 앉아서 저 멀리 우리 집으로 올 때 들어와야 하는 좁은 진입로를 바라보고 울며 앉아있던 내가 더 시리다. 거의 매일 밤 싸우고 엄마는 집을 나가겠다고 했고 그런 엄마 다리를 붙잡고 우는 건 항상 나였다. 언니들은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 상황에 잠이 와? 하며 언니를 원망했다. 언니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큰언니가 '너는 나보다 짧게 겪어서 그래. 나는 너보다 몇 년 더 겪어서 이제 이 상황에 익숙해"라고 말하기 전까지.


"나 어떻게 그렇게 살았는데 멀쩡하지?"

멀쩡한 줄 알았던 지금까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엄마였다. 엄마라는 답은 내가 얻은 답은 아니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언니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언니, 왜 괜찮은 거야? 왜 우리 그래도 잘 살고 있는 걸까. 한 명도 망가지지 않았고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잖아. 그 환경은 얼마든지 최악이었을 텐데.

"엄마가 우릴 사랑했잖아"

당연히 엄만 우릴 사랑했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엄마는 우릴 떠나지 않았다. 겨우 지금의 내 나이였던 젊은 아줌마는 악착같이 일해서 우릴 먹여 살렸다. 그리고 우릴 사랑했다.

아니, 당연하지 않았다. 알코올 중독 남편에 딸린 애가 넷이었다. 죽자고 돈 벌어도 돈은 죽어라 없다. 그 상황엔 결코 사랑이 당연하지 않았다. 빛 바래기에 충분한 모성이었으나 그녀는 몸 바쳐 우릴 지켰다.

거기에다가 신여성이었던 그녀는 우리에게 때에 맞춰 성교육을 해주었고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에 남묘호랑개교에까지 조예가 깊어 그렇게 점을 보러 다니고 부적을 온 집안에 붙여놨다. 줄반장 한번 해보지 못한 내게 '넌 대학교수된단다'라며 불가능하지만 기분 좋은 희망을 줬고 유머감각까지 겸비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녀였군. 내가 그냥 괜찮은 게 아니었고 그녀 덕이 었군.


엄마가 걸어와야 할 그 길


그렇게, 최악의 환경에서도 엄마의 사랑으로 쑥쑥 잘 자라서 잘살고 있었는데 나는 자꾸, 그때.. 가 생각난다. 생각도 못한 포인트에서 갑자기 그때, 그 집..  그 냄새.. 그 기억들이  자꾸 튀어나온다. 그냥 추억이라기엔 너무 아픈 그때의 내 표정, 친구들의 눈빛, 엄마의 욕설, 아빠의 무능이 내게 자꾸 말을 건다. 잊고 싶은 그때의 내가 손짓한다. 나 아직 니 안에 그대로 있어.  네가 이사를 그렇게 다니고 계속 직업을 바꾸고 남편이, 아이들이 전화를 받지 않으면 별의별 생각들에 걱정이 시작되고 남들의 양말에 그들의 경제상황을 추측하는 습관까지. 쭈그려 앉아서 울며 엄마가 걸어와야 할 그 길을 계속 보던 사람은 나였고 그 아이인 나는 자라서 지금은 나를 둘러싼 모든 곳에 불안을 흘리고 다닌다.


내 뿌리는 그렇게 내 열매 불안한 색깔을 가진 여러 가지 맛을 내게 한다.


 그 시절의 나와 이별하고 싶다. 근데 너무 자주 말을 건다. 나 아직 네 안에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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