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나쁘기만 한건 아니었다. 그 비닐하우스에서,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온전하고 안전한 울타리가 없었어서 불안하기도 했지만 이렇다할 책임감이나 목적의식도 없었기에 자유롭게 사고하며 뭘 해 내야한다는 스트레스나 압박감도 없이 자랐다. 알아서 잘 크면 되었고 우애좋은 사 남매는 서로를 의지하며 잘 자랐다. 그러나 야무졌던 언니들과는 달리 나는 항상 좀 부족했다. 친구관계도 쉽지 않아 언제나 끌려다니듯 지냈고 잘 씻지도 않고,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는 아이였다. 아무도 내 미래에 관심을 가져줄 수 없는 환경이었기에 내 꿈이나 인생계획을 세울 수도, 또 내 적성이나 진로 등을 파악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주어진 대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대로 어쩔 때는 빨간 우산, 어쩔 때는 파란 우산, 또 어쩔 때는 찢어진 우산을 쓰며 살아왔다.
단, 가난했고 부모님은 배우지 못했지만 아침마다 4형제의 도시락을 싸주시던 아빠, 언제나 최선을 다해 행복하려 했던 엄마 덕에 네 형제 모두 따뜻한 마음씨와 작은 일에도 웃을 수 있는 유머감각을 배웠다.그나마 조금 나았던 형편 때문이었는지 어릴 적 큰언니를 엄하게 가르친 엄마, 동생들 쥐 잡듯 잡던 큰언니 덕에 바르게, 착하게 살아야 하는게 당연했다. 그 비닐하우스에 살면서 학교 앞 고아원에 사는 친구, 언니, 동생들 다 집에 초대해서 라면끓여주고 백원씩 줘서 돌려보낸적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들판에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니기만 하며 공부는 전혀 안 했어도 언니들은 늘 학교에서 반장, 회장에 뽑혔고 그건 내 자랑이며 우리가족을 지키는 자존심이었다. 스타트라인이 다른 이들에 비해 뒤에 있다고 늘 생각했기에 무슨 일이든지 더 악착같이 해내려고 애썼다. 나는 늦은 나이에 춘천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다른 세 형제 모두 서울에 있는 번듯한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것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던 환경 덕분이었나 보다.
이것들의 결정체
그러나 나는 무엇을 이루겠다, 어떻게 살겠다는 목적의식이 없었기에 끝까지 완수하려는 인내심이 없었고 자존심만은 살아있어서 늘 남들 눈을 의식하다가 열등감이 느껴지면 그 자리는 떠나서 다신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래. 또 찾았다. 열등감이었다.
언니들이 자랑스럽지만 나는 언니들보다 못하다는 걸 알았기에 자존감을 지키기 어려웠고 이불 있냐는 친구의 물음에서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불난 곳에서 사람 하나 업고 나올 수 있어?라는 그 소방관의 물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열심히 해도 따라갈 수 없던 노련한 동료 선생님들에게 기죽어 이 일이 나랑 맞지 않는다고 좌절했고 '이게 5만 원이에요??'라는 손님의 뾰로통한 말에 내가 왜 꽃집은 차렸나 자괴감에 밤새 잠을 설친다.
열등감으로 내 직업을 찾고 열등감으로 내 직업을 버렸다. 어느 자리에서든지 나보다 잘 해내는 누군가를 보며 내 못난 모습과 비교한다. 더 잘 해내려는 노력조차 나를 위한 게 아닌 보여주기 위한 쇼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자꾸 맴도는 질문이 있다. 만약, 내가 선택했던 일들의 중심이, 본질이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었어도. 같은결과였을까. 열등감 넘어 꼭 해내고 싶을 만큼 좋아하는 일이었다면. 나에게 쉬운 과목으로 선발하는 시험에 붙을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불을 끄고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좋아서 소방관을 선택했더라면,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사랑하고 가르치는 일이 좋아서 교사를 선택했더라면, 장사가 해보고 싶고 신나게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꽃을 너무 사랑하고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꽃집을 차린 거라면. 그랬어도 그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었을까.
하지만 또 의문의 연속이다. 이 일들의 본질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만두었다는 것이 이렇게 직업을 계속 바꾼 것의 정당한 이유일까? 사실 나는 소방관, 교사, 꽃집 외에도 보습학원을 3년간 운영하기도 했었고 벨리댄스 강사가 되려고 지도자 과정을 이수하기도 했었고 서점을 차리려고 계약까지 했다가 파기된 적도 있었고 가베, 한자, 한국사, 보육교사 자격증을 소지하고기웃거린 곳이 찬란하리만큼 많다. 이 모든 방황과 고민의 시간을 본질을 좋아하지 않아서라고만 하기엔 뭔가 석연찮다.내가 택했던 직업들은 모두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 해내는 귀한 일자리일 텐데 그들은 진정 나보다 더 그 일들의 본질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자, 그렇다면 다시 정리해보자.
어릴 때 언니들에 눌려 온전히 자라지 못한 자존감, 엄마를 잃을까 봐, 가족 붕괴의 두려움으로 자리 잡은 불안감, 환경의 열악함이 선물한 열등감, 직업의 본질과 나의 성향의 이질감.
내 방황은 이것들의 결정체인가.아, 미치겠다. 알고 싶다. 나는 왜! 이럴까.
'특별한 삶'을 사는 나를 사랑한다고
그러다가 문득 그런데 왜 문제점에 집중하고 있지. 나, 정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나 이렇게 살아온 걸 후회한 적도, 부끄러웠던 적도 없는데. 화재현장에서 사람을 업고 나올 수 없고 자살한 사람의 가족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기에 나의 '양심적인'잣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고 힘들게 얻은 교사 타이틀을 지키는 것보다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는 일을 영혼 없이 하지 않겠다는, 나 스스로를 존중하는 '가치 있는' 결정을 했으며, 정말 많은 돈을 벌었지만 내 가정과 내 영혼을 돌볼 수 없었던 일을 돈과 타협하지 않는 '완전 멋진' 선택까지. 이거 쿨내 진동하는 삶인 거 아니야?
내 모든 선택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솔직하고 당당한 결정들이었어. 나는 그 선택들로 인하여 '성공경험'이 쌓이며 '쓸모 있는'사람임을 스스로 증명해 낸 시간들을 보냈고 많은 직업을 알고 사람을 알면서 세상을 향한 시각이 넓어졌으며 무엇보다 내 삶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아 재미있는데. 나... 완전 잘 살고 있는 거잖아.
그럼, 이제 나 스스로 인정해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힘든 어린 시절 잘 이겨내고 잘 살고 있다고.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일반적인'건 아니어도, '특별한'삶을 사는 나를 나는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