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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가 꿈꾸는 그곳 Feb 01. 2021

기억하나요 그 숲 속을

#12 엘 찰텐, 라구나 또레 가는 길


우리는 그저 바람일 뿐이었던가..?!!



예술가의 십계명 

-가브리엘라 미스뜨랄


첫째주 위에 존재하는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사랑하라. 

둘째, 무신론적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그와 유사한 존재를 만들어 놓고 그를 섬기라.

셋째, 아름다움을 감각의 미끼로 주지 말고 정신의 자연식으로 주어라.

넷째, 방종이나 허영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말고 신성한 연습으로 삼아라.

다섯째, 잔치에서 너의 작품을 찾지도 말 것이며 가져가지도 말라. 아름다움은 동정성이며 잔치에 있는 작품은 동정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섯째, 너의 가슴속에서 너의 노래로 끌어올려라. 그러면 너의 가슴이 너를 정화할 것이다.

일곱째, 너의 아름다움은 자비라고 불릴 것이며 인간의 가슴을 기쁘게 해 줄 것이다.

여덟째, 한 어린아이가 잉태되듯이 네 가슴속 피로 작품을 남겨라.

아홉째, 아름다움은 너에게 졸림을 주는 아편이 아니고 너를 활동하게 하는 명 포도주다.

열째, 모든 창조물 중에서 너는 수줍어할 것이다. 너의 창조물은 너의 꿈 보다 열등했으며 동시에 경이로운 신의 꿈인 자연보다도 열등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발을 디딘 파타고니아의 라구나 또르레로 가는 길에 만난 수목들은 우기를 앞두고 자연 갤러리를 연출하며 여행자의 발길을 붙들었다. 위대한 작품들은 무리가 따르지 않고 너무 자연스럽디. 신의 그림자가 깃든 아름다운 작품들이 우리 가슴에 안긴 것이다.


   지난 여정 파타고니아가 연출한 자연 갤러리 편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는 입춘을 코 앞에 두고 있지만 남반구는 겨울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처럼 4계절이 있지만 주로 건기와 우기로 부르는 곳이다. 북반구에 봄이 오시면 남반구에는 겨울이 오시므로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 라구나 또르레로 가는 길은 만추로 접어드는 것이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기억하나요 그 숲속을


  하니와 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중간중간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산길 곁으로 서 있는 오래된 나목은 물론 풀꽃들이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라구나 또르레가 위치한 거대한 골짜기에는 먹구름이 몰려들며 영화관에 쳐둔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그곳은 엘 찰텐의 명산 피츠 로이(Monte Fitz Roy)가 서 있는 산군의 골짜기로 빙하가 흐르는 곳이다. 동태평양의 고온다습한 습기가 해발 높이 3,405미터에 이르는 암봉을 거치면서 구름을 만드는 곳이다. 구름은 때때로 비를 뿌리거나 눈을 만들어 이곳 파타고니아의 남 빙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이곳에 살았던 원주민(인디오)들은 피츠로이를 쎄로 엘 찰텐 (Cerro Chaltén)이라 불렀다. 암봉을 스쳐 지나가던 습기가 구름을 만드는 모습이 마치 담배(Cerro)를 피우는 것처럼 여기며 붙인 재밌는 이름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목적지인 라구나 또르레(Laguna Torre)의 다른 이름도 쎄르로 또레(Cerro Torre)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그곳은 현재 먹구름이 덮여있어서 꼭대기(Torre)를 볼 수 없었다. 그 대신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씩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때마다 생각이 많아졌다. 당시 우리는 우비를 갖추지 못한 채 해돋이가 시작되기도 전에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배짱인지 우리가 세운 목표를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먼 나라 깊숙한 골짜기에 발을 디딘 우리를 지켜주는 분이 계시지 않았을까.. 




이틀 전 나의 브런치에 쓴 글 공포스러운 위험한 공간의 글에 이웃 한 분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그분은 최근에 이웃이 된 분이며 북조선에서 오신 분이었다. 브런치에 글을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밖에 안되었지만 스스로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글을 쓰는 재미는 물론 이웃과 소통하는 사이에 브런치가 부쩍 좋아진 것이다. 


나는 이 분의 이런 글을 좋아하게 됐다. 적지 않은 분들이 당신의 프라이버시 등을 적당히 감추는 데 비해 이 분의 글을 통해 진심이 느껴지는 솔직함이 마음에 든 것이다. 4차원의 공간에서 나누는 대화가 솔직 담백하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분의 필명은 자유로운콩세라는 분이다. 먼저 그분이 남긴 댓글을 만나보기로 한다.




한 7년 정도 일주일에 한 번씩 요양원에 다녔습니다. 요양원은 한번 들어오시면 나가시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늘 한밤중에 전화 오면 마음이 쿵~~ 합니다. 또 어느 분이 세상 인연과 멀어지시는구나. 급히 택시 타고 달려가면 마지막 숨을 몰아쉬지요. 가족분들은 울고 계시고요. 
의사의 위치가 있기에 임종을 지켜드림니다만. 세상살이 소풍을 끝내셨다 싶으면 저는 가장 먼저 꼭 안아드리고 식어가는 영혼에 속삭입니다. 


"가시는 곳도 괜찮으실 거예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죠. 편안하게 가시고 그곳에서 또 만나요. 할머니.."


제 부모님은 아니지만. 누구나 가는 길. 나도 갈 길. 따뜻한 배웅 속에 가면 외롭지 마시길 바래서요. 윗집 할머님께서도 사모님이 계셔서 외롭지 않으실 듯요. 마음 따뜻해져서 오늘 편안한 잠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요양원이라는 공간을 자세히 모르지만 몇 번 그곳에 들러서 그분들의 생활을 엿본 적 있다. 어떤 요양원에서 만난 할머니는 휠체어에 의지해 간호사들로부터 부축을 받으며 승합차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그 할머니의 코와 팔에는 가느다란 호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할머니는 고개를 푹 떨구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를 보는 순간 산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약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산자라고 볼 수 없는 식물인간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가슴에 짠한 전율이 흘러왔다. 나는 이때부터 요양원이라는 시설이 노인들을 버린 현대판 고려장(高麗葬) 제도로 정의해 버렸다. 



가족들이 없으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볼 일이지만, 가족들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돌보지 못하는 이유가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은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우리 형제들은 교대로 두 분을 간호해 드린 적 있다. 그렇다고 형편이 크게 나은 것도 아니었다. 모두 바쁘게 살고 있는 형제자매들이어서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가며 부모님을 마지막까지 보살펴 드린 것이다. 서울에 살고 있던 내가 그중 가장 불효 막심했다. 먼 거리에서 자주 돌보지 못했던 것이다. 후회막심하다. 



사정이 대략 이런데 자유로운 콩세님은 한 걸음에 달려와 할머니 귓전에 속삭이듯 죽음의 두려움을 덜어드리며 행복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여전히 문외한이다. 아이들처럼 먹고 마시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삶의 저편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인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종교가 있지만 종교가 해결해 주는 일 조차 여전히 미지수에 불과하다. 그런 생각이들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과학적으로 기록으로 사람들을 다독거리고 있지만 죽음 앞에서 어느 누가 자유롭겠는가. 영혼은 실제 하는가.. 천국은 정말 있는 것일까.. 사후의 세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등등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잠을 잘 때 편히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잘 아는 어느 유명 작가이자 방송인은 두 부부가 함께 죽음(자진)을 맞이한 일도 있다. 



그러나 한의사 출신의 자유로운콩세님의 믿음은 다부지다 못해 자신감이 넘쳤다. 그녀는 사후세계를 다녀온 것처럼 할머니를 편히 모시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이 같은 믿음에 대해 동의하고 나섰다. 누군가 온 곳이 있으면 갈 곳도 있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그날 밤 나는 기억에 남는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버지는 왼쪽에 서 계셨고 어머니는 오른쪽에 서 계셨는데 아버지께서 손을 내밀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나는 어디론가 길을 나서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나의 손을 잡아주시며 흐뭇해하는 것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마치 생시처럼 뚜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파타고니아 여행기를 끼적거리면서 소환한 삶과 죽음 그리고 꿈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생의 삶을 소풍에 비교하기도 한다. 잠시 다녀가는 소풍길..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니 조금은 슬프다. 한 번 밖에 없는 소풍이 인생이란 말인가. 하지만 당신의 깨달음을 놓고 볼 때 소풍을 왔으므로 떠나온 집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괜찮은 깨달음 같기도 하다. 



그곳에 당신을 낳아준 부모님이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다시 만나게 될 부모님에게 소풍을 떠난 우리 행성의 아름다움을 낱낱이 일러바칠 게 아닌가.. 마치 소설 천로역정(天路歷程)처럼 이야기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개도 만나고 소도 만나고 냥이 집사도 만나고 닭 소 보듯 하는 이야기는 물론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과 드런 사람 등 이야기는 끝도 없이 펼져지게 될 것이다. 



나는 그때가 되면 내가 둘러본 세상을 아버지께 낱낱이 고할 것이다. 아버지 생전에 늘 말씀하신 호연지기를 통해 세상을 주유한 아들이 돌아왔다면 아버지 어머니께선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두 분이 못다 한 일을 나와 하니가 하고 있었으며, 어느 날 우리는 라구나 또레의 숲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부모님과 조상님의 음덕에 힘입어 파타고니아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Il tesoro nascosto di El Chalten in Patagonia_LAGUNA TORRE
il Nostro viaggio in sudamerica, patagonia ARGENTINA
il Primo Febbraio 2021, Foto e Scritto di yookeun Chang_Geograf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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