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점성학(astrology)에 관심을 갖게 된 적은 2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대학시절 나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였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나는 미국의 모 주립대학 4학년 과정에 편입했는데, 당시 미국 대학원에 바로 입학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화학(biochemistry) 3코스와 유기화학(Organic chemistry) 과정을 이수한 후 내가 원하는 학과의 석사 입학이 가능하다고 했다. 편입과정을 이수한 후 대학원입학시험(GRE) 시험까지 통과한 후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러나 알고보니 지도교수님의 실험실에서 진행하는 실험이 생명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유학을 접고 귀국했기로 했다. 이런 결정에는 유전자가위(Cloning) 실험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이 뒤따랐다. 비록 유학시절은 짧게 끝났지만, 나는 미국인 그리고 멕시코, 러시아, 일본, 대만 출신 유학생들과도 어울리면서 서양점성학과 별자리명반(Horoscope)이라는 것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나의 별자리를 처음 알게 된 사건이다.
귀국 후, 나는 여러 대학원에 입학하여 커리큘럼을 이수하고 논문을 썼다. 그 가운데 내가 두번째로 진학한 대학원은 과학사를 연구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나는 유럽의 학문전통에서 19세기 전까지 전개되었던 자연철학(Philoloshpy of Nature) 분야를 접하게 되었고 그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자연철학은 과학(Science)이라는 학문이 19세기 후반 근대 대학에 정착하기 전까지 수 천년을 전승되어오던 중세 자연학 분야이다. 내가 머물렀던 연구실에는 수학 전공자가 한 명 있었다. 그녀는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석, 박사과정을 과학사(History of Science)로 진학한 여성이었다. 나는 그녀로부터 근대수학의 아버지가 '존 디(John Dee, 1527-1608)'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존 디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하지만 그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6~19세기까지 유럽에서 저술된 수학서 서문에는 어김없이 'John Dee'라는 이름이 언급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수학자로서의 존 디의 업적이 후대 학자들로부터 인정받고 추앙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존 디는 영국의 점성학자로 더 유명세를 떨친 사람이었다. 그는 웨일즈에서 태어나 젊을 적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그가 언제부터 별자리 운행과 그 상징적 의미를 연구하는 점성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그가 당대에 잉글랜드의 수학자, 연금술사, 점성술사로 활동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가 활동했던 1500년대는 16세기로서 이탈리아에서 태동한 르네상스가 정점에 이르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그리스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대 그리스의 헤르메스시즘(Hermesism)과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지적 숭배가 널리 유행했다. 그리스 신화나 신비주의 서적들에는 중세 교회와 기독교 성전을 중심으로 한 교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 담겨있었고, 자연 자체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관념은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 영국에서 태어난 존 디는 당대 유행하던 르네상스 사조에 빠져들었다. 그는 연금술과 점성학에 심취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물 인식의 객관적 측정을 중요시하는 근대 수학에도 눈을 떴다. 그의 젊은 시절은 파란만장하다. 총명했던 머리로 트리니티 대학의 수사학 교수로 자리를 얻었으나 연금술에 심취하는 바람에 파문을 당해 수도회에 감금을 당하게 된다. 그 후 그는 벨기에의 루벵 대학으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메르카토르(Mercator)라는 지도제작자를 만나 지도 두 벌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메르카토리는 현대 지도 제작의 선구자로서 존 디의 점성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존디는 지도를 이용한 항해술을 영국으로 가져와 영국 항해술을 발전시키는 데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존디는 학문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경제적으로는 어려웠다.
당시 영국은 메리 여왕이 즉위하여 피의 숙청을 통한 잔혹한 정치를 하고 있었다.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에 의해 런던탑에 갇혀 지내면서 목숨의 위협을 받았다. 어느 날 존 디가 엘리자베스의 별자리로 운명을 해석하면서 '앞으로 당신의 시대가 열린다'고 예언한 준 사실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런 사실이 알려져 존 디는 감옥에 갇히고 모진 고문을 받게 되지만,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메리 여왕이 1558년에 사망하게 된다. 25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에 오르게 되면서 존 디의 운명도 바뀐다.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는 존 디와 많은 정치적 문제를 상의하였으며 그의 경제적 상황도 크게 호전되었다. 존 디는 여왕보다 다 섯살이 많았으며 여왕이 탑에 갇혀 지냈을 때부터 그녀를 지지했기 때문에, 평생토록 결혼을 하지 않았던 여왕에게 존 디는 정신적 의지처가 아니었을까 예측해본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하던 시절 '대영제국(British Empire)'이란 말을 처음 제시한 이도 존 디이고, 그가 지도 제작 기술과 측량술을 영국의 항해술에 적용시켜 영국의 해군이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력은 잘 알려진 바이다. 엘리자베스 여왕부터 시작된 대영제국은 그녀의 자문 역할을 했던 한 점성학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