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가 많이 울었다.
밥을 먹다가도 울었고
책을 보다가도 울었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울었다.
울음이 2시간 쯤 이어지자
화가 났다.
"그만 울어."
그 말을 듣자 더 크게 울었다.
"엄만 내 마음도 몰라주고!"
내 죄는
배고픈 아이에게 간식을 주었고
목마른 아이에게 쥬스를 주었으며
심심한 아이에게 책을 읽어준 것이
다였다.
아, 2시간 째 아이의 울음 앞에
데시벨을 높이지 않은 것도 추가.
아이는 결국
울다 지쳐 잠들었다.
세숫물인지 눈물인지
젖은 아이의 앞머리를 쓸어내리고 있자니
아주 오래 전 기억이 떠올랐다.
한 6살, 7살 쯤 이었을까.
그 때의 나도 울고 있었다.
난 멈추고 싶었지만
좀처럼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잠궈지지 않는 눈물에 당황한 나는
점점 더 꺼억꺼억 울었고
울음이 그쳐지지 않는다며 더 울었다.
지친 나의 엄마는
나에게 나즈막히 한 마디를 던지셨다.
오늘의 나처럼
"그만 울어. 거울 좀 봐.
울때 얼마나 못생겼나."
그 이후의 상황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엄마 말을 듣고 거울에 비춰본
내 얼굴이 참 흉하다 느낀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돌이켜보면
엄마와 나의 관계는
대개 그러했다.
예민한 나는 사춘기가 참 버거웠다.
그래서 자주 울었고, 자주 방문을 닫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그랬다.
"그만 울어."
언젠가부터
난 더 이상 엄마 앞에서 울지 않게 되었다.
이 관계가 바뀐 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언제나처럼 TV를 보며 과일을 먹고 있었다.
동물농장이었나, 강아지가 전파를 타고 있었다.
"딸, 그 땐 엄마가 잘못했던 것 같아. 미안해."
엄마는 내가 13살 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엔 버릇없고
훈련 안 된 말썽꾸러기
3살짜리 푸들 한 마리가 있었다.
이름은 푸돌이었다.
사춘기를 혹독하게 겪고 있던 내겐
그 녀석이 흔드는 꼬리가 유일한 기쁨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와 엄마는
푸돌이를 키우는 방식으로 자주 부딪혔다.
집엔 자주 고성이 오갔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
현관 구두주걱 옆에 있던
빨간 강아지 집이 보이지 않았다.
파르르 떨며 당황해하는 내게
엄마는 아는 권사님 집에 맡겼다고 했다.
그 후로 녀석을 보지 못했고,
그 후로 엄마 앞에서 울지 않았다.
엄만 20년도 지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 걔 없어졌다고
니가 그렇게 힘들어할 줄 알았으면
엄마가 힘들어도 참을 걸 그랬어.
엄마가 몰랐어. 미안해."
참 오랜만에
동물농장을 보며 울었다.
뭐지, 이 후련한 기분은.
13살의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20년도 지나 들었다.
주눅들고 그늘져서 돌아온 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욱해서 서럽게 울던 날,
그 때 내가 듣고 싶었던 건
"그만 울어."가 아니라
"속상한 일 있었구나."였단 걸
이제야 알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사실은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할 지언정
그 때의 나에겐,
오늘의 내 딸에겐
속상한 일이 있었던 거다.
그런 딸에게
난 오늘
"그만 울어."
라고 말했다.
"엄마는 내 맘도 몰라주고!"
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
20년은 너무 하니까,
2시간 후에 잠에서 깨면
다시 이야기해줘야겠다.
속상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깐 그 마음 몰라줘서 미안했다고.
그리고 엄마에게도
이야기해야겠다.
그 땐 내가 너무 어려서
나 힘든 것만 알았다고.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했을지,
그 마음 몰라줘서 미안했다고.
그 때 엄마- 참 속상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