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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하융 Oct 23. 2017

퇴사는 여정이다

나의 회사 유랑기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로부터 내가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은 이렇다. 


“지금은 무슨 회사 다녀?”


오죽 많이 옮겨 다녔으면 그럴까 싶으면서도. 프로이직러라는 별명도 생긴 마당에 이런 질문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그냥 새삼 웃길 뿐.ㅋㅋ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처음부터 퇴사와 이직을 많이 하려고 한건 아니었다. 끊임없이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직업과 직업 사이를 유랑하게 되었을까.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삶이 모험이고 일상이 여행이라면 각각의 회사이자 브랜드는 고유의 문화와 규율을 가진 ‘나라’가 아닐까 하고. 물론 차이점도 많고 엉뚱한 상상이지만 나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각각의 문화와 원칙이 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회사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회사를 애정 하는 마음이 자부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애국심으로 이어지듯이. 어떤 면에서는 '같은 나라에서 다른 일을 하는 사람'보다도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과 취향도 더 비슷하고 말이 잘 통할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런 상상을 바탕으로 브랜드가 국가가 되는 미래에 대한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나라는 쉽게 바꿀 수 없지만 회사는 원한다면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다는 것. 나는 어딘가엔 조금 더 머물렀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좋은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다. 어딘가는 좋았던 곳이 불공정한 정치세력이 생기며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나라든 회사든 정보의 공유가 투명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권력을 남용하는 비선실세가 생기면 건강하지 못한 환경을 불러오는 건 마찬가지 같다. 다양한 곳에서 일하며 별의별 경험을 하고 별의별 사람들을 만났다.


돌이켜보면 어떤 경험을 했든, 나는 늘 얻어가는 게 있었다. 좋았던 경험은 최대한 내 것으로 소화시켰고, 안 좋았던 경험을 통해 '나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하는 경각심을 깨우기는 계기도 있었다. 멋진 어른들도 많이 만났다. 힘들었던 시기에는 그런 분들의 존재가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하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들을 하는 과정에서 나는 마치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다녀왔을 때처럼 스스로에 대해 조금 더 발견하고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다.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퇴사와 이직은 항상 내가 더 급성장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나는 부드러운 커브 곡선이 아니라 계단식 그래프로 여러 개의 전환점들을 맞이하며 성장했다.


이렇게 조금 엉뚱한 상상을 토대로 하면, 나는 지금까지 총 5개의 나라(회사)에 소속되어 있었고 현재는 6번째 회사를 다니고 있다. (인턴과 알바, 동생과 잠시 운영했던 쇼핑몰까지 합치면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난다.)


회사마다 일하는 방식이 달랐고 문화가 달랐다. 그리고 나는 각기 다른 곳에서 각기 다른 능력치를 얻을 수 있었다. 


나의 회사 유랑기 


지금까지 내가 다닌 회사는 이렇다:

미국 회사 1곳 + 독일 회사 1곳 + 한국 회사 3곳이고, 
에이전시 3곳(광고회사, PR회사, 디지털 에이전시) + 스타트업 2곳이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한국 회사고 스타트업이다. 


#1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나의 첫 번째 직업은 뉴욕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였다. 이 곳에서 글을 쓰는데 재미와 자신감을 붙였고, 취향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일을 못한다는 부끄러움과 잘하고 싶다는 절실함으로 인해 스스로를 좀 더 밀어붙이며 발전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2 홍보회사 AE + 대표님 전략비서

이 곳에서 신사업 AE로 일하면서 '같은 일도 무조건 다르게'하는 법을 배웠다. '생각하며 일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이건 추후에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되어주었고, 현재까지도 무슨 일을 하든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 대표님 전략비서로 일하면서 신입으로서 배우기 힘든 것들도 많이 배웠다. 경험이 없어 많이 부족했을 텐데 그런 기회를 사회초년생인 나에게 준 것에 대해선 아직도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이다.


이 곳에서 소중한 인연들을 얻었다. 평생을 갈 그런 인연들. 많이 웃고, 많이 울고. 각별한 마음으로 가장 뜨겁게, 가장 빡세게(ㅎㅎ) 일했던 곳이라 그런지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곳이다. 


#3 디지털 에이전시 BX팀

직원들의 능력이 좋아서 동료들로부터 어깨너머로 보고 많이 배웠다. 트렌드에 앞서 있는 친구들이 많아서 그 당시에 내가 생소했던 IoT부터 영화, 책, 디자인, 여행 등 동료들과 나누는 이야기의 폭이 넓어졌던 시기다. 디자이너들의 추천을 자주 받다 보니 하라 켄야나 안그라픽스의 책들을 많이 접했던 기간. 이때 처음으로 헤드헌터를 통해 이직을 하게 됐다.


#4 모바일 광고 스타트업 마케팅 매니저

본사는 베를린에 있고 미국, 한국을 비롯해 이제는 전 세계 도시 곳곳에 지사를 둔 스타트업. 이 회사가 속한 모바일 광고/애드테크 업계는 또 다른 세계였다. 업계 지식을 알고 있으면 진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많이 느꼈고. 계속 커리어를 쌓으면 커리어 패스가 고속도로처럼 뻥 뚫릴 것 같은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다. 이 곳은 빠르게 성장하고 싶은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곳이다.


한국에서 일하면서 진짜 글로벌하게 일했다.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출장을 다녔고, 영어로 일했고, 다른 나라의 동료들과 주기적으로 소통했다. 해본 적이 없던 B2B 마케팅에 생소한 업계라 가장 '챌린징'하다고 느껴졌던 시기다. 더군다나 한국 지사에 마케팅 담당이 나 혼자라 웹사이트 운영부터 블로그, 이메일마케팅, PR, 오프라인 이벤트까지 다 해야 했다. 그럼에도 야근은 진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안 했다. 꼭 야근하지 않고도 성과를 내는 게 가능하고, 진짜 효율적으로 잘 일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많이 배우고 느꼈던 시기다. 이 1년간 나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스스로도 실감이 날 정도로 회사도 크고, 나도 많이 자랐다. 이 기간 동안 일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업무 툴들도 많이 알게 되었고, 영어도 많이 늘었다. 


이때를 시점으로 나의 세상은 넓고도 좁아졌으며, 말랑말랑한 컨텐츠 마케팅만 해왔던 때와 달리 퍼포먼스 마케팅과 데이터의 힘을 체감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나에게 또 하나의 큰 전환점이었다. 이곳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음이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특히 가장 감사하는 건 글로벌하게 일하면서 전 세계 곳곳에 친구들이 생겼다는 것. 한국에 오면 꼭 보게 되는, 해외를 나가면 마음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재밌고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나는 처음으로 오퍼를 받았다. 그리고 그 오퍼를 받은 후 쓴 글이 내 브런치에서 가장 공유가 많이 된 글이다. 


#5 커머스 스타트업 마케터+프로모터

이 곳에서는 이전까지 배웠던 걸 마음껏 써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이 합쳐졌을 때 일이 얼마나 재미있을 수 있는지를 느꼈던 곳이다. 거의 무슨 내 회사인 것처럼 엄청난 애정과 에너지로 일했었고, 그만큼 내가 만족할만한 성과도 냈던 곳이다. 내가 가진 철학이나 생각과는 다르게 방향성이 바뀌면서 나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 곳을 통해 만나게 된 파트너와 동료들, 내가 쌓았던 경험은 정말 소중하다. 이곳에서 만난 많은 인연들이 아직도 이어져오고 있다. 


#6 지금! 

현재는 스페이스오디티란 회사에 있다. 이제 합류한 지 한 달이 좀 지났지만 공간도 좋고, 하는 일도 좋고, 사람들도 좋아서 기쁜 맘으로 즐겁게 일하는 중이다. 거짓말처럼 '음악'이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회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타트업 마케터의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합류하고 쓴 첫 글은 이것.



백수 이력서
- 사이사이 쉼표를 찍다


위에 있는 #1부터 #6까지 오는 중간중간 나는 쉼표를 찍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퇴사'를 전환점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 쉼표를 찍는 시간들이 나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을 하게 만들거나 생각을 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나는 여행을 떠나거나 책을 읽거나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가족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냈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했다. 


#1과 #2 사이 - 50일간 동유럽 여행
50일간 엄마와 동생과 동유럽으로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도 이 시기는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 기억들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장면으로 가득하다. 두브로브니크의 성곽이나 플리트비체의 요정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공원, 자다르의 바다 오르간에서 앉아서 본 노을, 카파도키아 새벽의 에어벌룬 등. 그리고 이 모든 걸 함께한 엄마와 내 동생. 아직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는 여행이다.


#2와 #3 사이 - 어떻게 살 것인가 

홍보회사를 그만두고는 정해진 행선지가 없었다. 이 몇 달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미친 듯이 고민했다. 이 주제로 내 주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다니고, 그 이야기들은 에세이로 엮어두었다. 내 동생, 친한 친구, 남자 친구, 엄마, 아빠와도 이런 대화를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이때 칼 세이건과 '보이저호'를 엄청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생겼고 이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가치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회사에서 나온 지 한 3개월쯤 지나자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돈도 떨어져 가고 있었고 연말이 다가오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다시 사로잡혔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때 준비가 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때 조금 더 용기를 내서 혼자 모험을 떠났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데. 조금은 급하게 부랴부랴 준비해 일자리를 구했다. 아, 물론 이 시간들도 후회가 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때 나는 준비가 덜 되어 있던 거니까. 그때는 이 조급함이란 게 내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인 줄 모르고 있었다. 초조해진 덕분에 얻은 게 있다면, 돈이 떨어져 가는 걸 보면서 아직까지도 거의 4년째 하고 있는 프리랜서 번역 알바를 시작했다. 절실해지면 방법을 찾게 된다. 


#4와 #5 사이 - 브런치를 시작하다

모바일 스타트업에서 오퍼를 받아 옮기기까지는 열흘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아주 짧은 쉼표를 찍은 기간이지만 그래도 이 시기를 적고 싶은 이유는 브런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나에게 소중한 개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많은 인연과 기회를 연결시켜주었다. 고마워 브런치 <3


#5와 #6 사이 - 대략 1년간 자발적 백수로 보낸 시기

자발적인 백수로 보낸 지난 1년. 가장 많은 도전을 하고, 경험을 하고, 후회 없이 보낸 1년이다. 이전까지는 해본 적 없었던 일도 제일 많이 했고, 가본 적 없었던 곳도 많이 다녀왔다. 내가 가진 두려움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마주했던 기간이자 생각하는 대로 행동에 옮겼던 기간. 


동남아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바르셀로나-포르투갈을 다녀왔고, 이번 모험의 하이라이트였던 버닝맨에 다녀왔다. 책도 많이 읽었고, '마인드풀니스'와 명상에 관심이 생겨서 열심히 연습해보는 중이다. 한국에서도 전 세계에서도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고, 재미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1년 사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걸 느끼고 배우고 가장 많이 성장한 느낌.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뭔가가 달라졌다. 내가 좋아라 하는 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알을 깨고 나온 기분이 든다. 


정말 신기한 게 뭐냐면 이런 인연들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원격으로 해외 파트너랑 일하는 업무를 함께 나눠서 하는 디지털노마드 크루 친구들이 생겼고, 서울의 인디 씬을 경험시켜주는 에어비앤비의 '트립 호스트'로 몇 달간 활동했다. 인생학교와 스토리펀딩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고, #1~#5까지 오는 동안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나에게 새로운 오퍼와 제안들을 던졌다. 놀겠다는 선언을 하고 몇 달 동안 20개 이상의 곳으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인생과 일과 여행의 공통점은 앞을 알 수 없다는 거다. 여러 개의 조직문화를 거치고 생각도 다르고 국적도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일해보고 어울리면서 나는 비교할 수 있는 표본이 넓어졌다. 이와 동시에 중간중간 쉴 때마다 읽은 책, 떠났던 여행과 새로운 경험들로 인해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다. 


나는 편견을 부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누군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떤 각도에서 보면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경우도 많고. 이렇게 고정관념을 깨다 보면 가능성의 세계는 훨씬 더 넓어진다. 세상을 조금 다른 시야로 바라보게 되면, 별 볼 일 없는 것도 별 볼 일 있는 경우가 많고, 할 수 없는 이유를 찾기보단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퇴사, 이직, 여행+쉼' 이란 과정을 반복하며 방황하는 듯 보여도 길을 잃지 않았던 건 나의 방향 설정은 늘 내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겼다. 그래서 이 매거진을 '나의 퇴사 여정기'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인복도 많고 운이 좋은 사람인 걸 안다. 좋아하는 걸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들이 생겼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지만 이런 기회들이 나에게 그냥 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동안 축적된 이야기들과 컨텐츠, 경험치가 쌓였기 때문에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었다. 함께 있으면 즐겁고 좋은 사람들, 재미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기 위해 마음고생하면서 나름대로 고군분투했던 과정을 지나 여러 가지 기회가 찾아오는 교차로에 다다를 수 있었고, 내가 조금 더 원하는 방향을 선택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퇴사는 끝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사실 모든 게 그런 것 같다. '끝'이란 게 정말 있나 싶다. 끝도 결국엔 새로운 시작일 뿐인 거 아닌가. 실패도 과정이고, 성공도 과정일 뿐이라 너무 낙심할 필요도 자만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도리어 모든 게 과정이기 때문에 현재에 충실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뭔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 방법을 찾지는 못할지라도, 현재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름의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거쳐 조금 더 원하는 방향을 향해 자기만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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