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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은 Oct 21. 2019

농부처럼 글쓰기

아빠의 농업 일지 훔쳐보기

나의 오랜 꿈은 글을 쓰는 것이다.

농부 아빠처럼. 


Prologue.


우연히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생업을 이어가고 있는 직업인이 되었다. 사실 편집자라고 해도 문제집을 만드는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 보니, 문학이나 에세이와 같은 단행본을 편집해 본 적은 없다. 또한 글쓰기가 오랜 꿈이었다지만, 글쓰기를 안 하고 산지 너무 오래되었다. 제대로 된 글쓰기를 시작해 본 적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글쓰기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 니체나 비트겐슈타인의 글을 탐독하고, <안나 카레니나>나 <보바리 부인> 같은 고전을 줄줄 꿰고 있는 지적인 다독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내가 제대로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서른이 훌쩍 넘은 어느 날, 몰래 펼쳐본 아빠의 ‘농업 일지’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다. 농업 일지는 그날의 날씨와 농사일을 기록해 두는 일기장인 셈인데, 한 해 한 해 쌓인 농업 일지는 농사일에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길 때면 가장 빠른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처방전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날짜와 날씨, 그날의 농사일과 농작물의 특이 사항 등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나는 농사꾼의 자식으로 자랐지만, 손에 흙을 묻히고 자라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육묘’라든지, ‘모내기’라든지 하는 농사 용어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자식들만큼은 거친 손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던 부모님은 더욱 철저하게 농사일에 대해 모르게 했던 것 같다.

이렇게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서른 중반의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는, 부모님이 시골에서 정성스레 기른 농산물을 보내주시면 철딱서니 없이 당연한 듯 받아먹으며 산다.  쌀이며, 사과며,  오이, 토마토,  양파, 감자 등을 자식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 보내듯 택배로 고이 올려 보내주시는 이제는 늙은 나의 엄마, 아빠.

자식들은 그네들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산지도 꽤 오래되었건만, 계속해서 뿌리를 뻗어 자식과 맞닿으려는 농사꾼 부모님.           


이제는 적응할만도 하건만

크고 작은 상처를 어른스럽게 감내하며 사는 듯 하다가 쓰러지기 직전 수액을 맞으러 시골집으로 향한다. 투박한 집밥은 수액이 되어 핏기 없던 얼굴은 어느새 생기가 돈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찾아온 고요함과 여유를 견디지 못하고 이내 집구석구석을 뒤적인다.


책장에 꽂혀 있는 농협에서 받아온 해 다 지난 노트를 꺼내 들었다. 노란 포스트잇으로 그 해의 연도로 새롭게 고쳐 적고, 혹여 떨어질 새라 거기에 또 테이프를 덧발라 놓은 아빠의 농업 일지다.   


         

<아빠의 농업 일지 실제 표지>

웬만한 슬픈 소설책을 읽어도 눈물이 잘 나질 않던 나였다. 그런데, 별 내용도 없는 평범한 농사꾼의 농업 일지를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다 보니 내 두 뺨엔 어느새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서 몇 분가량을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꺽꺽 울었다.

그날의 날씨와 농사일나열식으로 적은 이 단순한 문장들이 왜 이리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는지. 무언가 힘들고 지쳤던 마음에 아빠의 하루가 위로가 되었나 보다.   


<3월 30일의 아빠의 농업 일지 >   
3월 30일 맑음  
이제 삼월 달도 다 갔다.
산천에 초목은 잎이 트고 버드나무엔 푸른빛이 돋고 산수유 꽃은 노랗게 피어나고 있고
하우스 오이 정식할 밭에 유기농 비료 참조아 유박 등을 골고루 뿌려 놓았다.(12동)
저녁에는 지쳐 버렸다.


저녁에 지쳐 버린 아빠. 우리들에겐 단 한 번도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 아빠. 지쳐 버렸다는 저 짧은 문장 나를 잠시동안 멈춰 세웠다.



이 책 아빠 몰래 훔쳐본, 아주 평범한 시골 농부의 농업 일지 속 짧은 글들을 고, 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30대 딸의 일과 생각들을 들일 예정이다.


마음이 힘 누군가에게 조금의 위로가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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