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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양이 R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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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Dec 24. 2019

고양이 R

8화

얼마쯤 뛰었을까. 질질 발을 끄는 인간이 바람에 들썩이는 물건을 풀썩일 때 옴팡 밑으로 들어갔다. 나는 튀튀한 통 뒤에 몸을 기대고 바짝 엎드렸다. 아무도 나를 못 본 것 같다. 내가 몸을 움츠린 안쪽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보였다. 조금 있자니 썩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발이 차가워 아팠지만 숨을 고르고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코점박이가 퍼덕거리는 큰 애를 물고 왔다. 다리가 없는 애였다. 몸이 번쩍번쩍 했다. 코점박이는 잘난 체하는 기세로 눈에 힘을 팍 주더니 번쩍이는 애 머리를 우걱우걱 뜯어먹었다. 그러자 코점박이 머리가 번쩍이 머리처럼 변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다가 가만히 일어나 꼬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_아얏          


꼬리는 너무 단단해서 입이 아팠다. 번쩍이 머리를 한 코점박이가 이번에는 번쩍이 눈깔을 아작아작 씹더니 볼때기 살을 발톱으로 파서 먹었다. 발톱에는 찐득한 게 흠씬 묻었다. 멋있는 코점박이 모습에 반해 나도 꼬리를 콱 물었다. 입 안에 매운 즙이 가득 퍼졌다.   


입안이 텁텁했다. 입에 문 긴 쪼가리를 뱉었다. 풀썩이는 물건 밑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쇠붙이를 몰던 인간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컴컴하고 울퉁불퉁한 더미를 뒹굴고 자빠지면서 살그머니 밖으로 나왔다. 한 인간이 불이 켜진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부르르 몸을 털었다. 지저분한 부스러기들이 발바닥에 잔뜩 묻었다. 하지만 지금 몸단장할 때가 아니다. 그 인간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려고 얼른 달려갔다. 쾅. 양양 소리를 작게 내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코점박이와 노랭이와 얼룩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골목 끝을 봤다. 철창이 있던 자리는 부슬부슬한 부스러기들이 소복히 쌓였다. 흰둥이는 어디로 갔을까?     

     

다리가 후들대서 앞발을 두 번 핥고 고개를 드니 앞집 문이 열린 게 보였다. 안에선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살살  문 앞으로 걸어가서 들여다봤다. 아무도 없다. 반짝반짝하는 뭉치가 여기저기 뭉터기로 쌓였다. 나는 털을 바싹 세우고 냅다 구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몸을 웅크리자 가슴이 벌떡벌떡 방망이질 쳤다.      

 

크르릉 쿵 철컥     


어디에선가 나타난 인간이 불을 끄더니 문을 닫고 사라졌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한동안 벽에 찰싹 달라붙었더니 발이 숙숙 아팠다. 이럴 때 노랭이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줬을 거다. 코점박이는 성질을 부렸을 테지. 고개를 도리도리치며 구석에서 살금살금 나왔다. 혀를 입천장에 살짝 댔다가 뗐다.  

    

_양     


정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애들은 어디로 갔을까? 철창에 갇혀 살 때는 이렇지 않았다. 쇠붙이를 모는 인간은 우리를 집어던지듯 쇠붙이에 싣고 펄럭이는 물건을 쫙 펴서 덮었다. 코점박이도 노랭이도 흰둥이도 얼룩이도 얼굴이며 몸이 안 보였다. 우리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배고픔이나 추위도 같이 덮였다. 인간이 만든 어둠 속에서 우리는 다툼도 없고 울지도 않았다. 똥도 못 쌌다. 쿠르릉 쿠릉 덜컹 소리에 정신을 잃고 잠만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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