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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영돈 코치 Mar 31. 2019

만독:천천히 생각하고 느리게 읽기-고두현 시인

독습 만독 인터뷰 윤영돈

청년 때 글을 읽는 것은 울타리 사이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중년에 글을 읽는 것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며,

노년에 글을 읽는 것은 발코니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가 체험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이다.

 - 링위탕


《늦게 온 소포》로 알려진 시인이면서 한국경제신문 〈천자 칼럼〉으로 유명한 고두현 시인을 어렵게 만났다. 그는 남해 금산에서 자랐고,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등단했다. 1988년 한국경제신문 입사 후 주로 문화부에서 문학과 출판을 담당했고, 문화부장을 거쳐서 지금은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KBS와 MBC, SBS 등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에서 책 관련 코너를 오랫동안 진행했다. 저서《시 읽는 CEO》를 통해 시와 경영을 접목하여 독서경영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신작 《시를 놓고 살았다 사랑을 놓고 살았다》로 시에 담긴 인생의 지혜와 일상의 소중함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마지막에 꺼낸 이야기는 ‘느리게 사는 것이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이라는 것이었다. 고두현 시인에게 만독에 대해서 물었다.

Q. 책을 천천히 읽는 ‘ 만독’이란 무엇인가요?

그냥 읽을 때는 몰랐던 것이 천천히 읽으면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어떤 글이든 시처럼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천천히 읽다 보면 당연히 정독하게 되고 문장의 맛을 보면서 읽게 됩니다.

만독은 책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됩니다. 제 경험을 예로 들자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산에 나무하려고 헛간에 지게를 가지러 갔다가 《로빈슨 크루소 모험》을 발견했어요. 이 책을 정말 좋아해서 천천히 아껴 읽었는데 그것이 처음 만독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랐어요. 다락방에 올라가 혼자 책을 많이 읽었죠. 나이에 맞는 책을 가릴 것도 없이 활자로 된 건 다 읽었어요. 수줍음 많은 시골 소년에게 무한한 세상을 보여주는 게 책이었습니다. 몸은 비록 좁은 다락방에 있지만 책이 보여주는 세계는 무궁무진했고 정말 신기했어요. 여러 책을 통해 상상하고 호기심을 키웠죠. 특히 ‘서울에는 이런 미술관이 있구나!’, ‘시청 앞에는 이런 게 있구나!’ 하며 서울에 대한 동경을 키웠고, 서울에 가기 위해 공부했어요.


출판 시장이 어려운 요즘 상황에서 책을 만드는 것도 읽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저는 책관해서라면 한없이 긍정적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아요. 책에 대한 애정의 원천은 결국 사람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며, 그것이 또한 만독의 원동력입니다.


Q. 요즘 사람들은 성찰보다는 성장에 집중하며 조급해합니다. 이런 세간의 경향 속에서도 느리게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속도는 재는 사람의 눈금에 따라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해요. 관찰을 깊게 하면 이면이 보입니다. 손가락을 그린다고 손가락만 보면 못 그려요. 손가락 사이의 허공도 그려야 비로소 손가락의 의미가 드러나요. ‘손가락’이라는 활자의 의미를 넘어서야 이면까지 보입니다. 천천히 읽으면 무엇이 좋은지 알게 되어

있어요.


Q. 천천히 읽는 방법을 구체적으설명해주시겠어요?

일본에서 처음 속독速讀를 설파했던 다치바나 다카시는 ‘한쪽 읽는데 1초, 좀 늦더라도 2, 3초’라는 읽기 방식을 유행시켰습니다. 지금은 몸의 리듬, 마음의 속도에 맞춘 책 읽기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책 읽기가 더 이상 ‘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죠. 자칫 일이 되면 재미도 없어지고 목적 지향적으로 바뀝니다.

야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이라는 책은 황홀한 독서의 경험을 설명하고 있어요. 이 책은 ‘일본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한 구절로부터 시작합니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라는 구절인데요, 저자는 이 책을 세 번째 읽을 때 비로소 이 문장의 참맛을 느꼈다고 해

요. “석양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집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소설도 조용해진다. 그 장명에서 위의 한 줄이 턱 하니 나온다. 이렇게 고요한 야음夜陰의 광경이, 이렇게 적막한 말이 이 소설에 있었던가. 쓸쓸하고 절실한, 그래서 오히려 행복감마저 들게 하는 깊은 마음…. 몇 분인가 그런 기분을 맛보았다. 예전에는 거기까지 마음이 미치지 못했다. 그때는 이 절절하다고도 할 수 있는 문장이

눈을 속이고 지나가 버렸었다. 읽고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은 잊어버렸다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눈에는 비치지만 인상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왜일까? 답은 뻔하다. ‘빨리’ 읽었기 때문이다.”

책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천천히 읽으면 책을 강렬히 음미할 수 있습니다.


Q. 천천히 생각하고 느리게 읽다 보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옛날 서당에서는 성독聲讀을 시켰는데, 단순히 책을 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 읽는 힘을 키우는 방법이었어요. 2011년 일본에서 출간된 기적의 교실》 은 일본 전역에 슬로 리딩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책에 등장하는 중학생들이 하마다 준이치 도쿄대학교 총장, 야마사키 도시미스 최고 재판소 사무총장, 소설가 엔도 슈사쿠 등 나중에 일본 사회 저명인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배경은 일본 고베시 나다 중학교이고 교사는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이었어요. 우리나라 EBS 다큐프라임에서도 ‘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죠.

그 책을 보면 하시모토 선생은 소설책 《은수저》 1권을 깊이 읽는 수업을 진행합니다. 주입식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읽는 거예요. 학생들이 흥미를 좇아서 샛길로 빠지더라도, 모르는 것 전혀 없이 완전히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도록 책 1권을 철저하게 음미했습니다. 이를 미독味讀이라고도 해요. 학생들이 마음껏 의문을 갖도록 허용하고, 흥미 대상을 마음껏 찾을 수 있도록 열어줍니다. 천천히 읽고 깊게 생각하는 방법을 키우는 거죠. 하시모토 선생은 ‘노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슬로 리딩이 사람을 바라보는 방법, 모든 사물을 균형 있게 바라보는 사고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해요.

Q. 칼럼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독서법을 소개했는데, 구체적인 내용이 궁금합니다.

저는 ‘다산의 3·3·3 공부법’이라고 이름 붙여 봤어요. 첫 번째, 다산의 ‘삼근계三勤戒’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처음으로 맞은 제자가 열다섯 살의 황상이었어요. 일주일 뒤 다산이 문학과 역사를 배우라고 하자 소년은 쭈뼛거리며 “저는 둔하고, 막혔고, 미련해서 안 됩니다”라고 했어요. 이에 다산이 말했습니다. “배우는 사람에게 병통이 3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외우는 데 빠르면 소홀하고, 글짓기에 날래면 부실하고,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칠다. 둔한데도 파고들면 구멍이 넓어지고, 막힌 것을 틔우면 소통이 커지고, 어리숙한 것을 연마하면 빛이 난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고드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하면勤 된다. 틔우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하면勤 된다. 연마는 어떻게 하느냐? 부지런하면勤 된다.” 이것이 다산의 ‘삼근계’입니다. 황상은 이 가르침을 기둥 삼아 평생 학문에 매진했어요.

두 번째, 삼독법입니다. 다산은 책을 읽을 때도 뜻을 새겨 가며 깊이 읽는 정독精讀을 중시했어요. 꼼꼼하게 읽지 않으면 글의 의미와 맛을 제대로 음미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옮겨 쓰는 초서도 귀하게 생각했지요. 이를 항아리에 담아뒀다 하나씩 꺼내 읽었다고 해요. 책을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낀 점, 깨달은 것들을 기록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정독하고, 초서 하고, 메모하는’ 3가지가 다산의 삼독법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과골삼천踝骨三穿이란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느라 복사뼈踝骨에 구멍이 세 번이나 났다는 뜻입니다. 이는 명예로운 흉터였어요. 다산은 앉을 수 없자 선 채로 책을 읽었어요. 공자가 책 가죽끈이 세 번 끊어질 정도로 독서에 매진했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보다 더했습니다.

다산이 평생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이 여기에 있어요. 우리야 그 경지에 도달하기는 어렵겠지만, 책 읽고 글 쓰는 공부의 등불로 삼기에는 제격입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천천히 뜻을 새기고, 내용을 뽑아 옮기며, 생각을 메모하는 습관도 익힐 수 있어요. 부지런함이야 ‘삼근계’를 따르지 못하고 진득하기‘과골삼천’에 이르지 못하지만, 미욱함을 넘어서는 데는 큰 도움이 될것입니다.


Q. 어떻게 하면 책의 내용을 오래 기억에 남길 수 있을까요?

원래 대충 읽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어 있어요. 어떻게 하면 오래 기억에 남길까 생각해 보세요. 단어를 몰라도, 문법이 난해해도 앞뒤 문맥을 통해 스스로 유추하려 해야 합니다. 의미를 모르는 문장이 있어도 일단 쭉쭉 읽어 나가면서 뒤의 문장에서 힌트를 찾아보세요. 처음 읽을 때는 몰라도 다시 읽으면서 못 봤던 부분이 보이기도 하고, 뒤에서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해되는 대목도 있거든요.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방법은 음미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시를 읽을 때는 감각을 더욱더 깨워야 해요. 책상에 앉아 있지만 말고 일어나서 산책도 해보고 버스를 타서 창 밖도 보고, 또 느리게 걸어 보세요. 책을 읽다 보면 아이디어가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고두현 시인의 만독을 응원한다. 요즘 같은 속도의 시대에는 더욱더 마음을 챙겨야 한다. 천천히 생각하고 느리게 읽는 방식은 비단 책 읽기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음 챙김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책을 잡으면 우선 그 책의 저자와 하나의 마음이 되자. 눈 밝은 이가 되어 텍스트를 읽고 천천히 생각하고 느리게 걷자. 책 속의 목소리는 멈출 때 비로소 들려온다. 느리게 사는 방법이 풍요롭게 사는 지름길이다. 책이 내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책을 놓지 마라.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면 좋은 생각이 모이기 시작하고 느긋한 풍경이 나타난다. 당신은 지금 인생의 책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디쯤을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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