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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이키키 Mar 11. 2020

바틀비는 왜 안하고 싶다고 했을까?

허먼 맬빌의 단편소설 <필경사 바틀비> 

 어쩌다 부패 경찰이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 영화가 있다. 영화였는지 미드였는지 도통 제목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황량한 벌판에 카지노 사업을 펼치려는 마피아 두목은 카지노 건설을 반대하는 지역의 경찰이 골칫거리였다. 마피아 보스는 그 경찰을 불러서 아주 공손하게 이야기한다. "제가 제안을 하나 드리죠. 저희가 준비한 돈을 받고 카지노 사업에 협조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죽음을 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그 경찰은 겁을 먹고 마지못해 마피아 보스가 주는 돈을 받고 부패 경찰이 되고 만다. 이 경찰에게는 과연 선택권이 있었을까?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나니 문득 이 영화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출처: yes24


 <필경사 바틀비>는 <모비 딕>으로 유명한 허먼 맬빌 단편소설이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는 주인공은 필경 업무- 요즘 같으면 복사기가 하는 업무-를 하는 직원으로 '바틀비' 채용하게 된다. 밤이고 낮이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에 만족스러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틀비는 지시한 업무를 안 하는 것을 '선택' 하게 된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업무를 지시한 변호사에게 '안 하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변호사의 맥을 빠지게 한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해고했지만 바틀비는 해고마저도 거부한다. 결국 변호사는 바틀비를 피해 사무실을 옮기게 되고, 바틀비는 영업방해죄로 감옥에 가는데  감옥에서도  밥 먹기를 거부하여 굶어 죽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안 하고 싶습니다."


바틀비는 도대체 왜 일하기를 거부하였을까? 소설 속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가 던져 준 단서들을 바탕으로 바틀비를 이해해야만 한다(사실 많은 고전문학 이렇다). 바틀비는 맨 처음 필경 후 검토하는 업무를 거부하고, 그다음  잔심부름을 거부한다. 여기까지는 '부당한 업무에 대한 파업'과 같이 고용주와 고용인의 갈등 정도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바틀비는 그것을 넘어 자신의 본 업무인 필경 업무까지 거부한다. 그리고 변호사의 해고까지 거부한다. 이것은 고용주와 고용인 간의 계약의 부조리함을 넘어서 이 노동계약 자체 또는 이런 시스템의 부조리함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틀비가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는 장면이 나온다. 혹시 바틀비는 '왜 고용주가 돈을 주면 고용인은 노동을 제공해야 하는 걸까?', '고용주와 고용인은 누가 정한 걸까?' '누가 이런 사회계약 혹은 법을 만들었을까?' 창밖을 보며 이런 생각들을 한 건 아니었을까? 


'터키', '니퍼', '진저 넛' 그리고 '바틀비' 


변호사는 자신의 직원들을 공장의 공장의 나사처럼 효율적으로 관리를 했다. 성격에 맞게 직원들을 능수 능란하게 다루었다. 하지만 변호사에게 그의 직원은 하나의 '복사기' 였을 뿐이었다. 변호사는 그들에게 각각의 별명을 지어주며 별명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 별명은 하나같이 먹는 음식들이다. 하지만 바틀비만은 유일하게 변호사가 별명이 아닌 이름을 부른 직원이었다. 이것은 바틀비 만을 유일하게 인간 복사기가 아닌 인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변호사가 바틀비와 덜 친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에도 '바틀비' 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만큼 이름의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의 마지막에 바틀비의 이전 직업이 나온다. 전송되지 못한 우편물을 파쇄하는 업무를 했다고 한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는 뭘까? 편지야말로 인간의 선택과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보여주는 도구이다. 단어 하나하나를 선택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인간 만이 할 수 있는, 인간성을 상징하는 이 편지를 없애는 일을 했다는 것은 바틀비 자신이 그동안 인간성을 죽이는 업무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이직한 변호사 사무실 역시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결국 편지는 곧 인간성을 상징하고 그곳에서 편지를 파쇄하는 바틀비 본인은 자본주의의 노동계약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부패 경찰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마피아 보스의 제안에는 선택권이 없다. 그가 아무리 공손하게 그리고 많은 양의 돈을 제시했다고 해도 협박일 뿐이다.  결국 경찰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마피아가 주는  돈을 받는 수밖에 없고 부패 경찰이 되는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 사회 역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세상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선택은 부지불식간에 강요되었던 것처럼. 바틀비는 이런 어쩔 수 없는 선택 앞에서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며 안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이 결국 죽음으로 이끌더라도. 마치 부패 경찰이 되어 목숨을 부지하고 살바에는 죽겠다고 한 것처럼. 저자는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단편소설이라 짧은 시간에 책을 다 읽었지만 책장을 덮고 생각을 한 시간이 더 길었던 것 같다. 이것이 고전문학의 힘이 아닌가 싶다. 다소 무거운 주제와는 다르게, 사실 이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실제로 읽어보면 굉장히 재미있다. 바틀비를 쫓아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소심한 변호사를 표현하는 장면이나, 시간대 별로 성격이 바뀌는 그들의 직원을 표현하는 장면은 출간한지 150년이 지난 세월의 독자에게까지 웃음을 선사한다. 미국의 고전문학을 한번 읽어보고 싶은 독자에게 그 출발로 <필경사 바틀비>가 제격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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