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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행복조각

by 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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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6년을, 내 삶의 거의 2/3를 함께 한 사람과의 기념일이다. 이 친구를 처음 본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여학생이 전학 왔단 이야기가 우리 반을 휩쓸었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전학생이 있던 반으로 달려갔지만 내 이상형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이후로도 전학생과 딱히 마주칠 만한 일은 없었다.


시간이 흘러 전학생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고 1학년 때 우리는 조금 친해졌다. 그래봤자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이때부터 전학생을 J로 부르기 시작했다.


2학년이 되었다. 우리는 1학년 때 보다 조금 더 친해졌다. 아마도 J와 같은 독서실을 다니게 된 게 가장 큰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동네에 살아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우리 학교에 다니는 애들은 대부분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어느 토요일이었다. 방과 후 영화를 보러 친구들과 학교 후문을 나서는데 J가 우리를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그러자고 했고 영화관으로 함께 이동했다. 하지만 영화는 보지 못했다. 우리가 보려고 했던 영화가 전 세계를 강타한 히트작이었고 그날은 어른들이 데이트하기 좋은 날이었으며 우리는 예매를 하지 않은 채 전국에 몇 없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왠지 모르게 J가 친구가 아닌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J는 예상과 달리 도도하지 않았고 새침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밝게 웃는 모습이 예뻤다. 전학생이었던 J와 그날의 J는 다른 사람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자꾸 J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며칠을 혼자 끙끙대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고백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절친이 내게 누구냐고 물었지만 답할 수 없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J의 이름을 꺼내는 게 창피했다. 아마도 절친은 전학생으로 봤던 J의 모습을. 아니, J를 보며 이상형이 아니라고 말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호기심 가득한 절친의 눈을 보자 괜한 말을 꺼냈단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이때부터 절친은 날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고백했던 날도, 그다음 날도 나를 괴롭혔다. 어쩔 수 없이 말하기로 했다. 대신 방법은 내가 정하는 걸로 했다. 쪽지에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절친의 집 우편함에 넣어 두겠다는 게 첫 번째 원칙이었고 내가 문자를 보낼 테니 그전까지 절대 우편함을 열어보지 말 것이 두 번째 원칙이었다. 절친은 규칙을 잘 따라주었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쪽지를 확인했는지 바로 전화가 왔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크게 소리 내며 웃고 있었다.



"네가 J를? 진짜? 왜?"


"아 몰라. 끊어"



다음 날 절친과 교실에서 만났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어제보다 더 크게 웃는 것 같아 재수가 없어 나지막하게 욕을 해줬다. 절친은 자신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손에 든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리듯 마음이 풀어졌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절친의 말을 믿고 나는 나대로 움직였다. 요즘 말로 '플러팅'이라는 걸 열심히 준비 중이었다. J는 독서실에서 나오는 시간이 정확한 친구였다. 시간에 맞춰 나는 J를 집까지 데려준다며 따라나섰다. 사실 걸어서 5분도 되지 않는 거리를 굳이 데려다줄 이유도 없었지만 쏜살같이 지나가는 순간조차 정보수집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하루는 J가 설거지를 하려는데 고무장갑에 구멍이 났단 이야기를 했다. 기회였다. J를 데려다주고 근처 슈퍼마켓에 가서 핑크색 마미손 고무장갑을 하나 샀다. 그리고 J의 집 대문 앞에 놔둔 후 문자를 보냈다. 대문 앞에 뭐 사다 놨다고. 내 딴엔 최선의 '플러팅'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플러팅은 아주 잘 먹혔었다고 한다) 하지만 걱정이 있었다. 한 달이나 흘렀지만 J는 내게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다른 내 친구를(절친과 다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 친구와 더 자주 이야기했고 더 많이 웃었다. 사랑과 우정 사이라니... 하필 왜 내게 이런 시련을... 고민이 깊어졌고 절친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절친은 묘수가 있다며 기다려 보란 말과 함께 사라졌다.


그날은 J 때문에 도저히 공부가 되지 않아 독서실에서 일찍 나와 방구석을 뒹굴 거리고 있었다. 마침 절친에게 전화가 왔다. 나보고 뭐 하냐며 묻더니 아직도 J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이 새끼가 사람 속 뒤집어 놓으려고 작정했냐며 욕을 한 바가지 해줬다. 욕을 먹었는데도 절친은 집요하게 물었다.



"아! 당연하지!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에 집에 와서 이러고 있지!"


"아 진짜지? 너 진짜 J 아직도 좋아하지?"



그렇단 대답을 하자 절친은 잠시 후에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30분 정도 지났을 때 절친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가 다 매듭을 지었다고 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되물었더니 혼자 신이 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실은 J에게 윤기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J가 그럴 리가 없다며 믿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래도 믿지 않길래 J 앞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도 좋아하냐는 질문을 절친이 하고 내가 답할 땐 J의 귀에 전화기를 가져다줬다고 했다. 그제야 J는 절친의 말을 믿었고 사실은 자기도 윤기를 좋아하고 있었단 말을 J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절친의 말을 듣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 나를 놀리는 게 아닐까 싶은 의심과 사실이길 바라는 마음이 교차했다. 절친에게 장난이면 죽여버린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절친은 진짜라고 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 맞았다.


다음날이 됐다. 밥상이 다 차려졌는데 사나이가 되어서 머뭇거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1교시가 끝나고 J가 있는 반으로 나섰다. 고작 한 층만 내려가면 되는 건데도 발걸음이 그토록 무거울 수 없었다. 하지만 관성의 힘을 믿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어느새 J의 반 뒷문에 다다랐다. 문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아이에게 J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눈치가 없는 건지 일부러 그랬는지 J를 크게 불렀다. J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주변에선 "오~~" 하는 탄성이 쏟아졌다. J의 손에 쪽지를 하나 쥐여줬다. 그리고 말했다. "자리로 돌아가서 혼자만 봐..." 쪽지엔 학교 끝나고 몇 시에 전화하면 좋겠냐는 말과 문자로 알려달란 말을 적었다. 잠시 후 답장이 왔다. "6시..."


J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 사귈래?"


"아... 그래..."



J에게 답을 들은 그날은 1999년 7월 27일이었다.










오늘은, 어쩌면 결혼기념일보다 더 소중한 아내와 처음 사귀기로 했던 날의 26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아직도 그 시절이 눈에 선한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네요. 이번 주는 그때의 추억 중 일부를 잠시 소환해 저의 행복 조각을 채워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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