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번째 주, 매일 글을 쓰는 의미에 대하여
이번 주 드디어 만들고 있던 책이 막바지 작업에 들어갔다. 이번 작업을 하면서 느낀 게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던 건 역시나 글이었다.
쓰고 있는 책의 장르가 포토 에세이다 보니 사진이 주가 되는 것이 맞다 생각했지만, 글밥을 어느 정도 채우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호기롭게 사진과 글을 모두 꽉꽉 채우고 싶어 브런치에 쓰고 있는 글자 수 정도로 페이지를 채워봤다. 그랬더니 이건 포토 에세이도 아니고, 에세이에 사진을 덧댄 것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이 나왔다. 역량이 부족한 걸 눈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결국엔 글밥을 줄이고 사진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글자 수 집착을 덜어냈는데도 글이 써지지 않았다. 난 이미 독자가 있는(단, 한명일지라도) 공간에 글을 써오고 있었기에, 지금 만들고 있는 책도 그것과 비슷하게 접근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집필에 들어가니 뭔가 달랐다. 글을 쓰는 물리적인 환경은 다르지 않았지만, 블로그나 브런치에 글을 쓸 때처럼 글자가 채워지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가 만든 책에 돈과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를 느끼겠느냔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할 수 없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애초에 그런 질문도, 답도 존재할 수 없단 걸 깨달았다. 독자에게 닿을 수 있는 글과 사진을 담는 노력은 나의 몫이지만, 그걸 평가하는 건 오롯이 독자의 몫이었다. 나는 나의 몫을, 독자에겐 그들의 몫을 남겨두었더니 그제야 글을 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모니터의 하얀 화면은 여전히 텅 비어있다. 이제는 글감이 문제였다.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공감을 불러내는 글감이 뭐가 있을까', '내가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많은 질문과 쉽게 나오지 않는 답 사이의 공간은 너무나도 광활했고 차가웠다. 일렁이는 파도가 조금이라도 거세질라치면 위태롭기 그지없는, 망망대해 한복판에 떠 있는 나룻배 신세와 내가 무엇이 다를까 싶었다. 그저 나의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세상에 보여주자고 했던 것뿐인데, 이제는 왜 글을 쓰지 못하는지 질문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은 공허하게 돌아오는 메아리 같았고, 발버둥 칠수록 빨려 들어가는 깊은 늪과 같았다. 그때 날 구원해 준 건 일기장이었고 거기에 남겨진 독자의 짧은 소감들이었다.
책장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뽀얀 먼지가 쌓인 앨범과 같은 것을 열었다. 그건 1년 동안 거의 매일 일상을 적었던 블로그였다. 글과 사진을 보는데 그때의 내가 낯설었다. 분명 내가 쓴 글이 맞는데, 그런 생각과 글을 썼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더 진귀한 것은 글마다 달린 독자의 짧은 글이었다. 적게는 한 명, 많게는 스무명 정도. 함축된 글로 나의 일상을 본 소감이 남겨져 있었다. 독자의 글은 적은 글자 수가 무색하게 깊고 따뜻했다. 그들의 글이 시답잖은 나의 일상을 빛내주었다. 내가 쓴 것 같지 않은 글과 그곳에 남겨진 댓글을 읽으며 글감을 얻었고, 용기를 얻었다. 지금까지 고민했던 '공감'에 대한 의미도 다시 생각했다. 블로그와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쓰고, 발행했을 때의 마음을 되새김질했다. 그때도 그랬다. '별 볼 일 없는 일상 글에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이런 나약한 생각이 날 의심하고 막아섰지만, 그런 소음 따위는 무시했었고, 결국엔 '그냥' 썼다.
잊고 있던 나와 독자에게서 글감을 건네받을 수 있었던 건, 소통할 수 있는 곳에 묵묵히 기록한 일기 덕분이었다. '매일 쓰려고 해보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 써먹을 곳이 있겠지' 블로그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막연하게 했던 생각 중 하나였다. 결국 그때의 생각이 그리 헛된 망상은 아니었단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매일 일기를 쓰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글감을 찾을 수 있었을까. 기억도 감정도 매 말라버린 머릿속 어딘가를 헤집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조그마한 흔적이라도 기록해 뒀던 예전의 나에게 감사함이 밀려왔다.
대단한 이벤트가 있을 때만 '오늘'이 특별해지는 건 아닐 거다. 아무리 소소한 일상이라도 그 안에 잠자고 있는 감정을 깨우고, 찾아서 기록하는 순간 나의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꾸준히 기록된 일상은 누구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이유도 없는 나만의 특별한 역사가 된다.
글감은, 사소한 일상을 기록한 특별한 일기장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