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 번째 주, '나'를 알아가는 과정 속에 필요한 것에 대하여
그제였다.
"글을 왜 쓰고 싶은 거야?"
글을 쓰고 싶단 친구에게 한 달 전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이번엔 답을 찾아오기로 했는데 만만치 않았나 보다. 결국 만남의 원래 취지였던, 함께 글을 쓰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글을 왜 쓰고 싶은지 함께 찾아보기로 했다.
"그냥"
친구의 답은 심플했다. 그렇지. 뭘 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니까. 글이라고 뭐가 다를까. 그냥 쓰고 싶을 수도 있는 거였다. 하지만 친구가 뱉은 '그냥'이란 말속엔 어떤 역사가 있지 않을까? 이대로 '그냥'이란 말을 흘려보내긴 아쉬웠다. 그래서 내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 가볍게 들려줬다. 그러자 친구의 동공이 커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 어렸을 때부터 일기 쓰는 걸 엄청 좋아했어!"
어렸을 때 일기 쓰는 걸 좋아했다던 친구는 이후로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관성이 붙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글을 왜 쓰고 싶었는지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처음 말대로 정말 '그냥' 쓰고 싶은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왜'라는 단어 하나에 친구는 잊고 있던 '나'를 찾아냈다.
이어 나온 친구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주변에 했을 때 사람들은 "뭘 쓸 건데"라는 말은 했어도, "왜 쓰고 싶은 건데"란 말은 하지 않았었다고 했다. 친구가 어렸을 땐, '왜'라는 질문을 너무 많이 해서 엄마가 귀찮아했었을 정도였는데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왜'를 잊고 살았단 걸 오늘 깨닫게 됐다며 말이 빨라졌다.
나로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오히려 묻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주변에 꽤 많은 사람도 그랬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쑥스럽지만, 다양한 장르에서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내겐 꽤 많은 편이다. 그러면 나는 의견을 말하기 전에 반드시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되물어본다. 그러면 대부분은 답을 하지 못한다. 본인 스스로가 그런 궁금증이 왜 생겼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단 거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답을 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궁금증이 왜 생겼는지 모르는데 어떤 말이 돌아온다 한들 그것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많은 사람에게 돌아온 답으로 통계를 내면 그것은 정답이 될 수 있을까.
반면 답을 하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였는데 이들 대부분은 나에게 하는 답으로 본인의 질문을 해결했다. 이들은 이미 질문하기 전 답을 알고 있었던 거다. 나에게 던진 질문을 이미 자신에게 여러 번 던져봤던 거였다. 그 과정에서 '나'를 알게 된 상태로 조언을 구하니 이어지는 몇 번의 질문만으로도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거였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기 전, 우선 자신에게 질문을 하다 보면 답을 얻을 확률이 높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며, 타인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도 무척 많단 뜻이다. 물론 이 과정이 만만한 건 아니다. 답을 얻기까지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허비될 수 있어,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자신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생략한 채 누군가에게 답을 얻는 것이 오히려 더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라는 질문에서 얻을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은 무엇일까.
존재하는 이유.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고, 어떤 성향의 사람으로 존재하는가.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은 '나'를 알아보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그 어떤 누구도 답해 주거나 대신 찾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외마디 질문 하나에서 숨겨져 있던 '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왜'라는 질문은 심연에 갇혀 있던 '나'를 찾기 위한 동력이 된다. 친구가 글을 쓰고 싶던 이유를 찾았던 것이 단순히 글쓰기에만 국한된 것이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친구는 글쓰기가 아닌 '나'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친구의 얼굴이 밝아 보였던 건, 잊고 있던 '나'를 찾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