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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융글 Apr 07. 2024

26화. 그땐 그랬지(1)

반(半) 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지혜는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의 산소를 찾았다. 아니, 거의 처음이라고 해야 하나.

 지혜가 아직 걷지도 못할 때 돌아가신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그의 엄마도 부득불 자식들을 끌고 모친의 산소를 찾진 않으셨기에 할머니가 잠들어있는 묘지가 지혜는 꽤나 낯설었다.


 "엄마, 외할머니 기일이 언제더라? 이번 달이지? 올해도 산소 찾아갈 거야?"

 일상대화 중 용기 내어 물은 지혜의 말에 엄마는 다소 의외라는 듯 물었다.

 "가야지, 다다음주 화요일. 왜?"

 평소 하지 않는 행동을 하려니 기분이 묘한 지혜였다. 쑥스러운 듯하면서 상대의 반응이 기대돼 약간은 들떠 대답했다.

 "아니, 나도 올해는 한 번 가보게. 주형이도 초등학생 됐으니까, 둘이서 차 타고 그 정도는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주형이 입학했다고 외할머니한테 인사도 시킬 겸. 한 번도 데려간 적 없잖아."

 지방에 사는 엄마를 찾아가려고 할 때면 명절이 아니고서야 엄마는 늘 손사래를 쳤었다. 아니다, 그 먼 길을 굳이 올 필요 없다, 애 힘들다, 니 고생이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엄마는 어떤 감정인지 모를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랄래? 이번엔 주형이랑 한 번 와볼래?"


 지혜는 엄마와 나란히 할머니의 산소 옆에 앉아 있자니 마치 할머니까지 셋이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사진 속 할머니의 얼굴만 기억하는 그로서는 그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주형을 키우다 보니 엄마의 노고와 소중함, 그간의 희생이 그제야 조금은 이해되는 날들이었다. 주형이 마음 고생시킬 때도 그러했지만, 이상하게 이쁜 짓을 하고 사랑을 줄 때 더더욱 엄마 생각이 났다. 맞아, 엄마도 날 이렇게 키웠겠지 라는 마음에.

 그러다 문득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과 어릴 적 잠들기 전 간간이 들려주곤 했던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생각난 것이었다. 엄마도, 그의 엄마에게서 나와 같은 사랑을 받았던 이야기들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산소는 사이좋게 나란히 붙어있었다. 생전 그들의 금슬과는 상관없다는 듯 아주 다정히도.

 엄마와 할머니의 고인에 대한 추모 의식을 어리둥절하고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주형은 어느새 묘지의 내리막 발치에서 혼자 뛰놀고 있었다. 손에는 방금 고인 드시라 올려두었던 사과 조각 하나를 든 채 무엇이 그리 좋은지 방방 뛰었다 멈추었다 땅을 헤집었다 웃었다 하며 신이 났다.

 "역시 애들은  풀어놔야 돼."

 품 하나 들지 않고서 자연과 오랜 친구인 양 노는 주형을 보고 지혜는 편한 마음이 되어 말했다. 엄마 역시 웃으며 대답했다.

 "맞재. 내도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묘지 있는데 많이 놀러 갔었다. 학교 마치면 친구들이랑 오늘은 산소 갈래, 해서 같이 가고 풀 뜯고, 꽃 꽂고, 개미 구경하고 그래 놀았는데."

 "친구들이랑 묘지로 놀러 갔다고? 어우, 으스스해. 그건 좀 이상한데?"

 "참 나, 별스럽기는. 그게 다 자연이고 자연이 놀이턴데 뭐가 으스스하노. 흙 밟고 좋은 공기 마시고, 최고의 놀이지."

 "하긴, 그렇긴 하네. 요즘은 뭐 그런데 갈 데도 없고 흙이며 공기며 깨끗하지도 않아서. 가봤자 키즈카페나 집에서 장난감 가지고 놀거나 그러는데. 저렇게 신나게 노는 거 보면 참 미안하네. 근데 엄마는 어릴 때 그렇게 놀았던 게 기억이 나나? 엄청 옛날 아니가?"

 "당연하지, 내 나이 돼 봐라. 어제 일은 기억 안 나도 5,60년 전 일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니까?"




 "명숙아, 놀자!"

 명숙은 주말에도 늑장은 용서하지 않고 이른 아침부터 잠을 깨운 엄마에게 불퉁하게 심통이 나 밥술을 뜨는 듯 마는 듯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때, 대문 밖에서 친구 말자의 목소리로 추정되는 호명소리가 들렸다. 존심 상하게 심술 나 있던 명숙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명숙의 엄마는 그런 딸을 흘깃 쳐다보곤 밥상 앞의 딸에게 들으라는 건지, 문 밖의 그의 친구에게 들으라는 건지 아니면 둘 다를 향해 일타 쌍피를 날리는 것인지 목소리를 크게 키우며 소리쳤다.

 "명숙이 밥 묵는다! 밥 다 묵기 전까지 못 나간다!"

 명숙은 숟가락 가득 밥 한 술 퍼 입 속에 빠르게 집어넣기 시작했다.


 발간 볼을 기분 좋게 데우는 따스한 햇살에 봄기운이 도타워졌음을 느끼는 명숙이었다. 모두들 간밤에 잘 잤는지 친구 말자와 영희의 쌍꺼풀 없는 눈은 조그마한 초승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뭐 할까? 고무줄 먼저 할까, 살구 먼저 할까?"

 "다 있나? 가져왔나?"

 친구들 사이 꼼꼼한 걸로 치자면 둘째 가면 서러운 영희가 양 쪽 불툭한 주머니에서 먼지 묻은 까만색 고무줄과 동글동글 조약돌 같은 다섯 개의 공기를 꺼내 보여주었다. 명숙이 자란 곳에서는 공기놀이를 살구놀이라 불렀다.

 

 아이들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첫 놀이를 살구놀이로 정했다. 어디에 자리 잡을까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서 있던 자리에 마냥 눌러앉았다. 손바닥을 먼저 땅에 집고 흙바닥에 내앉으며 흙 묻은 손은 그저 양손 부딪쳐 탈탈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살구천재 말자가 먼저 시작했다. 1단, 2단, 3단,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공기를 높게 띄워 올리고 그 사이 귀신같이 바닥에 있는 나머지를 잡아내는 말자였다. 단수가 올라갈수록 멀리 떨어진 공기를 한 번에 잡느라 손이 더 바빠졌다. 흙바닥을 전전하던 손가락 끝이 금세 검어졌다. 하지만 친구들 중 그 누구도 그 모습을 더럽게 여긴 이는 없었다. 그보단 말자가 웬일로 긴장했는지 5단에서 다섯 개의 공기알을 모두 잡지 못한 것이 그들에겐 더 중요했다. 니 오늘 살구 안된다, 까르륵 웃어대며 친구를 놀려댈 뿐이었다.


 한참 앉아 놀자니 슬슬 엉덩이가 근질거렸다. 야, 우리 고무줄 하자라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 일시에 엉덩이를 훌훌 털고 일어섰다.

 가운데 말자를 두고 양 옆으로 명숙과 영희가 고무줄을 나눠 잡았다. 발목에 고무줄을 감는 1단계부터 시작해 노래에 맞춰 고무줄을 밟지 않고 잘 넘으면 다음단계로 승격했다. 고무줄은 점차로 높이가 높아졌다. 키가 훌쩍 큰 영희와 조막만 한 명숙의 비대칭에 고무줄은 언제나 기울어져 있었다.  

 고무줄에 있어서는 말자가 으뜸이었다. 명숙으로 치자면 허리, 가슴까지는 어찌저찌 다리를 찢어가며 통과하지만 꼭 겨드랑이에서 꽉 막히고 마는 것이었다. 이게 다 엄마 닮아 다리가 짧아서 그런 것이라, 원통해했다.

 하지만 말자는 달랐다. 겨드랑이 넘어 어깨, 머리, 심지어 팔을 번쩍 들어 올린 '만세'자세까지 학다리 쭉 뻗어가며 아무렇지 않은 듯 넘기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아니 오늘은 컨디션이 다른 날보다 더 좋은지 '만세'에서 까치발을 든 자세도 모두 통과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아아~.”

 다소 비장한 가사조차 소녀들의 명랑한 가창에 그저 신나는 고무줄 노래가 되어있었다.


 친구들의 활약을 보자니 명숙은 조금 이골이 났다. 살구놀이도, 고무줄도 모두 명숙은 친구들보다 조금 모자란 실력이었다. 때마침 친구들도 땡볕에서의 고무줄놀이에 이마가 땀에 흠뻑 젖어 지친 기색이었다.

 "야, 우리 산소 갈래?"

 명숙의 제안에 친구들은 모두 웃으며 고개 끄덕였다.

 

 누구의 산소인지도 모를 무덤이 가득한 그곳을 가는 길엔 맑은 물 졸졸 흐르는 냇가가 있었다. 꽤나 목이 탔던 아이들은 냇물을 모두 없앨 기세로 냇가의 물을 퍼마시고 땀으로 젖은 머리를 폭 담가 훌훌 감아버렸다. 때마침 불어오는 따뜻한 봄바람이 피부의 시원한 물기운과 만나 금세 몸의 열을 식혀주었다.


 가느다랗고 짤막한 다리로 이리저리 오르막을 잘 타고 올라 명숙의 별명은 '날다람쥐'였다. 명숙아 같이 가자,라는 뒤통수에 내리 꽂힌 친구들의 소리를 즐기며 명숙은 뛰듯이 야트막한 산을 가볍게 올랐다.

 이내 일곱여덟 개의 무덤이 한 곳에 자리한 산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이 명숙과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그곳에선 동네가 한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고, 언제나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친구들이 다 올라오려면 몇 분은 더 있어야 할 것을 명숙은 알았기에, 무덤을 휘 둘러보다 중간에 자리한 제일 높은 것 위에 올라 털썩 앉았다.

 쪼게가 우리 집, 쪼오오게가 영희집, 말자 집이 저건가? 허공에 손가락으로 장난감 집처럼 보이는 집들을 짚어가며 제 집과 친구들의 집을 찾아본다. 시끌벅적한 동네가 이곳에 오면 인형놀이 하는 집보다 작아 보여 세상 모든 게 시시하게만 보였다. 명숙은 그런 기분이 좋았다.

 시시껄렁한 세상을 신선이 된 양 즐기자니 친구들은 그제야 헥헥대며 목적지에 당도한다. 명숙은 그들을 쓱 돌아보고는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야 이 가시나야, 같이 가자고 했잖아. 가시나, 좀 잘 간다고 생색은."

 친구들의 타박에도 명숙은 그저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어떻게 지내는지, 살아는 있는 건지 알 길이 없는 옛 친구들 떠올리며 이야기하자니 지혜의 엄마는 문득 그 옛날이 그리워졌다.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기억에 세월의 무상함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이제 더 이상 그런것에 놀랄 나이도 아니건만.

 그러다 눈앞에 그 예전의 저처럼 들판을 헤집고 다니는 손주를 보자니 가슴 한켠이 따땃해 졌다. 그래, 저 아이가 저리 이쁘게 자라는 것으로 되었다. 이제는 저 아이가 주인공이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지혜는 엄마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나 때만 해도 주형이보다는 엄마랑 비슷하게 논 거 같은데. 냇가에서 머리는 안 감았어도 나도 살구놀이랑 고무줄놀이는 했거든."

 엄마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무슨, 매 티브이만 봤지."

 지혜는 억울해하며 말했다.

 "아이다, 나도 일요일에 아침에만 티브이 봤지 다 보고는 밖에 나가 놀았는데?"

 "맞나?"

 엄마는 일절 기억이 없다는 듯 무심히 대꾸했다.



 지혜는 일요일 아침에도 8시가 되면 퍼뜩 눈을 떴다. 저 멀리서 물 건너온 인기 만화, 디즈니만화동산을 꼭 봐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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