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半) 픽션 <슈퍼맨은 없다_우리가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일어나라, 아침 해 떴다 친구 만나러 가자-."
지혜는 간신히 디즈니만화동산이 시작하는 시간에 맞추어 티브이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지혜와 지민 자매가 가장 좋아하는 곰돌이 푸 시리즈의 오프닝송이 집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이미 먼저 와 앉아있던 지민을 지혜는 슬긋 째려보고선 왜 나 안 깨워줬어,라고 타박했지만 지민은 되려 입꼬리 씨익 올리며 얄미운 웃음으로 대꾸할 뿐이었다. 언니가 늦게라도 일어난 게 아쉽다는 듯.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어찌나 빨리 흐르는지, 벌써 프로그램이 끝났음을 아쉬워하며 지혜와 지민은 엄마의 부름에 늦은 아침을 먹으러 식탁을 향했다.
"언니야, 우리 오늘은 뭐 하고 놀래?"
"글쎄, 뭐 하고 놀지. 부루마불 할까, 아니면 인형놀이?"
일요일 아침을 이르게 열어준 티브이 프로그램 덕에 지혜와 지민 자매의 손에 많은 시간이 쥐어졌다. 달걀 프라이와 김구이만으로 차려진 간단한 아침 밥상을 맛있게도 먹으며 다음 놀이는 무얼 할지 궁리하던 때였다.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엄마는 늦은 아침을 먹는 어린 딸들 옆에서 청소기를 밀다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얼른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옹, 누구세요옹."
전화를 받을 때 유독 간드러지게 목소리가 변하는 엄마를 보고 지혜와 지민은 쿡쿡거렸다. 고요해진 집 덕에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식탁에 자리한 딸들에게까지 그대로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저는 김지혜 친구 이현정입니다. 혹시 지혜 집에 있으면 바꿔주실 수 있으실까요."
또박또박 야무지게도 제 할 말을 하는 전화상대방은 지혜의 학급친구 현정이었다. 밥 한가득 넣어 김을 싸 먹던 지혜가 친구의 반가운 음성을 듣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엄마는 씩 웃더니 김지혜! 현정이 전화 왔다,라고 크게 말해주며 수화기를 딸에게 넘겼다.
위이이이 잉- 위이이이이이이잉- 딸의 통화에도 아랑곳 않고 엄마가 다시 밀기 시작한 청소기 소리에 지혜는 친구 현정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귀에 수화기 모양이 찍힐정도로 바짝 붙여 30분 뒤에 아파트 놀이터에서 보자, 약속했다.
"나도 갈래! 나도 언니 따라갈래!!!"
"안된다니까, 니가 따라오면 편이 안 맞는단 말이다."
신발장 앞에서 자신을 따라오려는 지민을 떼내느라 지혜는 애를 먹고 있었다. 지혜는 지민을 종종 자신의 친구들 노는 곳에 같이 데려가긴 했지만, 오늘은 혼자 가고 싶었다. 지민을 데려가면 쪽수도 안 맞을뿐더러 운동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지민을 배려하느라 저도, 친구들도 여간 귀찮은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데려가라! 지민이 안 데꼬 나가면 니도 못 나간다!"
엄마의 불호령에 지혜는 어쩔 수 없이 지민을 챙겨 나갔다.
친구들은 이미 여럿이 모여 디즈니만화동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혜가 동생 지민을 데리고 나온 걸 보고서 약간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지혜와 지민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미안, 엄마가 지민이 꼭 데리고 나가라고 해서......."
친구들에게 미안해진 지혜가 사과하자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괜찮다, 지민이 그냥 깍두기 시키면 되지. 술래잡기부터 할래? 지민아, 니는 깍두기 해리."
지민은 그저 신이 나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지혜와 친구들은 술래잡기를 하면서도 지민은 일절 신경 쓰지도, 잡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지민은 언니들 따라 여기저기 후다닥 뛰어다니며 신나게도 놀이를 즐겼다. 게임에 참여한 듯 참여하지 않은 듯 뛰어노는 지민이 웃기고도 귀여운 지혜였다. 바람에 머리 휘날리며 함박웃음 짓는 지민을 보자니 데려오길 잘했다 싶었다.
미끄럼틀 거꾸로 올라가거나 철봉에 박쥐처럼 매달리며 놀이터의 기구들을 본래의 기능보다 익사이팅하게 즐기다, 놀이터 가득한 모래를 산더미처럼 쌓아 모래 가져오기 게임을 하다, 땅에 북북 선 긋고 팔방치기 하다 보니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친구들은 점심 다 먹고 영심이까지만 보고 다시 자전거 들고 나오자, 약속했다. 약속은 칼 같이 지켜졌다.
지민도 언니들의 두 발, 네 발 자전거 옆에서 이미 제 몸에도 조금 작아진 세발자전거를 열심히 굴리며 그들을 쫓았다. 페달을 아무리 반복해 굴려도 지겹지가 않았다. 빠른 속도감과 자신들의 컨트롤에 취해 해가 기울어 저물녘이 되어도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발을 굴렸다.
"김지혜, 김지민, 이제 들어온나."
지혜의 머리 꼭대기에서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친구들은 올 것이 왔다는 듯 속도 내던 바퀴들을 서서히 멈춰 세웠다. 하루종일 붙어 있으며 놀았건만 놀이의 끝자락이 오니 아쉽기 그지없었다.
이내 이현정, 저녁 묵으라! , 최은주! 니도 들어온나, 등등 나머지 친구들 역시 엄마의 부름을 받았고 그들은 그제야 진정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서 더 이상의 놀이는 단념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봐봐, 엄마가 놀았던 거랑 비슷하재?"
지혜의 옛이야기에 엄마는 그제야 그 시절이 기억이 난다는 듯 빙긋이 웃었다. 맞네, 라며 약간의 맞장구까지 쳐주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이야기했다.
"근데 그건 니 초등학교 갓 들어갔을 때 이야기고. 조금 더 커서는 누구 집에 가서 게임하고 온다카고, 조금 더 커서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고 그랬잖아."
그랬나, 지혜는 다시 과거를 돌이키다 그 말도 틀리진 않아 반박하지 못했다. 재밌게 놀았던 기억은 친구들과 밖에서 흙 만지고 뛰어놀던 기억이었기에 기계를 만져 놀던 때는 단박에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엔 그 기계들이 더 재밌었던 것 같았는데, 이상했다.
혼자만의 흙놀이를 마친 뒤 엄마의 품으로 걸어오는 주형의 손은 흙 말고도 무엇을 만졌는지 온통 시커메져 있었다. 지혜는 아들의 손을 보며 기함을 하고선 에코백에 챙겨 온 물티슈를 두 장 꺼내 아직 자신의 손 반의 크기도 안 되는 작은 손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어유, 손톱 밑까지 다 끼었네. 김주형, 뭐 만졌어? 엄마가 아무거나 함부로 만지지 말랬잖아."
주형은 어깨를 으쓱거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야, 그 작은 손 하나 닦는다고 무슨 물티슈를 두 장이나 뽑아가지고 그라노. 자연에서 놀아야 된다느니 그때가 좋았다느니 하면서 지가 그래 못 하게 하네."
엄마의 촌철살인에 조금은 무안해진 지혜가 대꾸했다.
"아니, 요즘 흙은 더러우니까... 옛날에는 흙이 더 깨끗하고 했으니까 그렇지..."
"흙이 흙이지, 그게 더러우면 얼마나 더럽다고 그라노. 그리고, 그 흙 더럽게 하는 게 니 손에 있는 그 물티슈다 야. 소독약 덕지덕지 붙은 거 그거 썩어 없어질라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 그거, 니 그거 다 챙겨서 가래이 어디 흘리지 말고."
엄마의 말이 틀린 말 하나 없는 것 같아 더욱 무안해진 지혜는 아무 말 없이 다 쓴 물티슈를 돌돌 말아 가방 구석에 쑤셔 넣었다.
할머니의 산소로 내려온 김에, 지혜는 주형과 친정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엄마를 제 차의 옆자리에 앉히며 운전하자니 조금은 긴장되는 지혜였다. 운전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외려 몸을 더 굳어지게 했다. 그런 딸의 미숙함이 감지되었는지 엄마는 창문 위 달려있는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꼭 붙든 채 불편하게도 앉아있었다.
주형은 이미 뒷자리에 앉아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낮잠이란 걸 자는 게 얼마만인지, 차창으로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곤히 잠든 주형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바깥공기에 신이 나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나름 피곤했구나 생각하니 더욱 그러했다. 벌써 초등학생이지만 아직 지혜의 눈엔 어린 아기였다. 지혜는 흐뭇해하며 말했다.
"오늘 주형이 숲체험 활동비 아꼈네."
엄마는 의문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뭔데?"
"아, 우리 아파트 옆에 숲 공원 있잖아. 거기 애들 몇 명이랑 선생님 한 명이 같이 가서 숲 산책하면서 무슨 풀이고 꽃인지 알려주고, 곤충 같은 거도 뭔지 알려주고 그러는 거. “
엄마는 여전히 손에서 손잡이는 놓지 않고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참 나, 별시럽다 야. 그거 해서 얼마 받는데?"
지혜는 엄마에게 넌지시 금액을 알렸다. 엄마는 놀란 눈치였다.
"야, 그 돈 내 줘라. 내가 주형이 데꼬 산에 올라가서 요래요래 말만 해주면 되는 거 아이가."
엄마의 지레 놀란 반응이 재밌어진 지혜는 그를 놀리듯 더 얘기했다.
"숲체험은 좀 싼 건데. 애기들 가는 자연테마 키즈카페도 있거든, 거기는 50분 체험에 요래 한다."
지혜는 양손으로 꼭 잡고 있던 핸들에서 오른손을 살짝 떼어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이며 얘기했다. 엄마는 더욱 기겁을 했다.
"뭐라고? 거기 뭐 금이라도 묻어놨나, 환장하네."
"금은 안 묻어놨고, 그냥 실내에 흙 깔아 두고 이쁘게 꾸며놨지. 애들 사진 잘 나온다고 엄마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요즘 엄마들은 뭐 돈으로 경험을 사는 겸 데리고 간다니까 뭐. "
"참 나, 별시럽다 별시러워."
엄마는 진정으로 그것이 별스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세차게 저었다. 그런 엄마의 반응이 지혜는 조금 통쾌했다.
사실 지혜가 그 이야기를 넌지시 꺼낸 건 자신의 경험과 관련이 있었다. 지혜도 엄마가 별시럽다고 하는 그곳에 주형을 데려갔었고 이게 맞나,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