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써두고 본격적으로 내용을 쓰기 전 머릿속으로 먼저 대략적인 정리를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랑의 티가 나지 않게, 하지만 부러움이 은은하게 발산되도록. 종종 하던 일이었기에 한 번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핸드폰 위에 손을 올리니 물 흐르듯 글이 줄줄 나왔다.
저희 동네에서 신촌까지 통학이 나을까요, 자취가 나을까요?
이번에 저희 아들이 신촌에 있는 학교의 신입생으로 통학 중인데, 아이는 괜찮다고 하는데 영 피곤해 보이는 게 마음이 안 좋더라구요. 자취방을 얻어줄까 싶다가도 마냥 놀기만 할까 걱정되네요. 그런데 또 통학으로 피곤해서 공부에 지장이 있을까 걱정되고요. 여태는 혼자서 공부를 잘 해 왔긴 하지만요 ㅎㅎ
혹시 비슷한 경험이 있으시거나 아시는 분 계시면 댓글 부탁드려요.^^
대놓고 아들 하준을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글 안에서 여유로운 기운을 내뿜는 듯한 글을 쓰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직 하준의 자취방을 구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아니었지만, 지금 이래저래 지친 나에게는 무언가 더 힘이 되어줄 글들이 필요했다. 질투, 부러움, 관심, 뭐 그런 것들.
글을 올리자마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댓글이 달렸다. 역시, 먹혀들었다.
- 어머, 신촌이면 혹시 연대일까 싶어 닉네임 보니 맞는 듯하네요. 입학 축하드려요 ^^ 저희 동네에서 신촌이 좀 애매하긴 하죠. 그래도 버스로 다닐 만한 것 같아요.
내 예상답변에 적중. 조금 더 부러워해도 되는데, 그래도 뭐 이 정도면 양호했다.
- 아드님이 연대 다니나 보네요. 축하드려요. 제가 딱 20년 전에 같은 상황이었어요. 그때는 버스가 많이 없어서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버스가 꽤 있는 것 같아 무리는 없을 것 같아요. 아드님이 제 후배네요 ^^
애매한 답변이다. 하준의 학교를 추정하고 축하한 것까진 좋았으나 본인 역시 같은 학교를 나왔다고 굳이 어필하는 게 왠지 되려 말린 느낌이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
- 저랑 같은 고민 중이시네요. 제 딸은 이번에 관악으로 통학하는데 진짜 고민이 많이 돼요 ㅜ 신촌은 그래도 관악보다는 교통편이 괜찮은 것 같아요.
이런. 기분이 말할 것도 없이 나빠졌다. 관악이라니. 당했다. 하준은 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가지 못하고 2등의 대학에 가서 항상 1등 앞에서 작아지게 하는 것인가. 오늘따라 기분 좋아지려 올린 글에 된통 심통이 나 버려 글을 삭제할까 고민하던 새에 문제의 댓글이 달렸다.
-자제분이 신촌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한 거 맞으시죠? 그럼 이제 20살이겠네요. 신촌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게 아닌 이상, 충분히 혼자서 그런 부분은 결정할 수 있을 거예요. 아이는 괜찮다 했다고 언급하셨네요. 그럼 본인이 괜찮은 거겠지요. 힘이 들고 엄마가 필요하다면 그때 엄마한테 요청하지 않을까요? 아이 대학생 될 때까지 잘 키워놓으셨으니, 이제 좀 놓으셔도 될 것 같아요.
전혀 예상치도 못 했던, 머리를 때리는 듯한 댓글이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열이 나면서 숨이 차올랐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어떻게 댓글을 달아야 되나 고민하면서 댓글을 썼다가 지웠다가 다시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공격적으로 썼다가 너무 발끈하는 것 같아 지우고, 우아한 척 의견 감사하다 썼다가 울화가 터져서 지우는 사이, 문제의 댓글 밑에는 숫자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222, 333, 444, 555....
저 말도 안 되는 아줌마의 의견에 동감한다는 댓글들이었다.
이럴 수가. 믿었던 동네 친구들이 배신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태 나랑 같은 마음이 아니었던가? 우리 같이 좋은 동네에서 애들 잘 키우자 암묵적으로 약속하고 서로 은은한 자랑에 맞장구 쳐주고 행복하게 지내자던 거 아니었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화끈거려 글의 삭제버튼을 눌러버리고 핸드폰을 엎어두었다. 얼굴은 뜨겁다 못해 다 타버려 재가 될 것 같았고, 이를 식히고자 거실 창을 열어 바깥 바람에 얼굴을 내맡겼지만 텁텁해진 봄바람에 양 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흥분되는 걸까. 그 여자의 무례함 때문이었을까?
그랬을 수 있다. 나는 적어도 상대방에게 저렇게 무례한 언행을 일삼는 여자는 아니니까. 인터넷의 익명성을 이용해 상대를 공격하는 행위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니까. 더군다나 믿었던 우리 동네의 카페에서 저런 무례한 공격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단 말이다.
아니면, 조금 솔직해져서 내가 쓴 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당해서 당황했던 것일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다. 보통의 날이었다면 그냥저냥 부럽다고 넘어갔을 내 글에 오늘따라 유독 날을 숨긴 댓글들이 많이 달린 것 같다. 그 모든 게 내 의도를 정확히 간파한 댓글이기 때문에 더욱 당황스러웠던 걸지도. 심지어 그 무례한 여자의 댓글에는 공감의 댓글이 적어도 4개 이상은 달렸으니까. 조금 창피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자랑을 좀 더 교묘하게 숨겼어야 했다.
문득 몇 주 전, 컴퓨터로 카페활동을 하다 딸 하진에게 들켰던 날이 떠올랐다.
"연대공대맘? 저게 엄마 아이디야?"
집중하느라 옆에 온 줄도 모른 하진이 내 컴퓨터 너머를 보며 경악스럽다는 듯 말했다. 치부를 걸린 것 같아 잠깐 당황했지만, 틀린 말은 없으니 당당히 대답했다.
"그래, 왜? 맞잖아, 연대공대맘."
하진은 찌푸린 얼굴을 풀지 않은 채 말했다.
"그게 뭐야, 너무 대놓고잖아. 그리고 엄마가 연대공대도 아니면서, 연대공대"맘"이라니. 어우... 엄마 학교도 아니고 오빠 학교인데..."
듣다 보니 조금 화가 나 언성을 높여 대답했다.
"그게 뭐? 하준이 학교지만 내가 보냈잖아. 여기 있는 엄마들은 엄마한테 아들 좋은 학교 보냈다고 대단하다고 얼마나 칭찬하는 줄 아니? 내 공을 인정 안 해주는 건 이놈의 집안 식구들 뿐이라고. 너희가 나 칭찬해줬어 봐라, 어? 어디 가서 내가 "나 아들이 연대 다녀요"라고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가 없지. 고마운 줄 모르고 말이야, 다 자기들이 잘해서 간 줄 알지. 너도 말이야, 김하진! 너 엄마가 학원 알아봐 주고 스케줄 짜주고 하루 두 끼며 간식까지 건강식으로 챙겨주고, 운동 하라고 헬스 보내주고, 여기저기 라이딩해주고 하니까 그나마도 그 성적 유지하는 거야 너."
하진은 조금 시무룩해져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조금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우리 너무 챙기지 말고 엄마 챙기라는 얘기지. 나 헬스 안 가도 되니까 엄마도 운동 좀 하고, 오빠도 암만 그래봐야 고마운 줄 모르니까 지금이라도 엄마를 위해 엄마가 하고 싶은 거 하라는 얘기라고..."
시무룩한 하진을 보며 난 되려 소리를 더 높여 대답했다. 하진의 마지막 말에 괜스레 발동이 걸린 것이다.
"하고 싶은 거? 이제 와서 갑자기 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찾니? 여태 너희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하고 싶은 걸 찾으라고? 어디서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와서는."
하진은 말없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느덧 내 심장을 찔렀던 댓글들의 많은 말들이 흐려지고, 몇 문장만이 남아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중 "이제 좀 놓으셔도 될 것 같아요"란 글이 유독 가슴에 남아 목에 걸린듯 숨을 막히게 했다.
찬물 세수라도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가히 오랜만에 본 듯 하는 거울에 비친 내 꼴은 말이 아니었다.
홍당무처럼 벌게진 얼굴은 둘째치고 대충 묶은 머리에 듬성듬성 새치가 자리잡고 있는 꼴이며 햇볕을 받은 왼쪽 얼굴 여기저기에 실선 같은 주름들이 깊게 패여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처음 본 듯한 보잘 것 없는 늙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선 나를 절망의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손 쓸 새도 없이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꺼이꺼이 구슬픈 소리와 함께 목에서도 울음이 함께 터져나왔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가 나올 것 같아 주먹쥔 손으로 가슴을 두드려보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변기통을 열어젖히고 쭈그려 앉아 구토를 시도했으나 헛구역질만 나왔다. 숨이 점차로 가빠지면서 온 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이대로는 화장실에서 쓰러질 것 같아 밖으로 나가야겠다 생각하는데, 그대로 변기통 옆에 쓰러져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 그날의 기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