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상관없는 슈퍼카, 상관있는 보험료
이곳에서 차를 구매하면서 한국보다는 약간은 더 합리적인(?) 가격에 놀라움을 느꼈다. 차 가격에 무딘 편인데도 한국보다 좀 덜 지불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실제로 비교해봐도 한국보다는 살짝 더 저렴한 편. 그런데 차 가격에 기분이 좋아 ‘돈 굳었다’며 좋아하며 방심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무척 비합리적인 보험료 폭탄에 급작스레 뒤통수를 한대 퍽 맞았다.
“다른 보험은 없어요? 여기 말고 더 저렴한 데 있을 거 아니에요?”
“없습니다.”
가격 비교도 좀 해보고, 따져보고 싶어서 알아보니 정말 이곳은 보험사가 딱 한 군데더라. ICBC. 전에 말한 운전면허를 관리하는 곳에서 보험료도 모두 관장 중이다. 원래 ICBC라는 이름 자체도 실제 Insurance Corporation of British Columbia의 첫 글자들만 따서 만들 말이다. 즉 보험을 주로 관리하는 곳이라 여겨진다. 한국은 동OOO, 삼OOO, 현OOO 등등을 비교해서 내가 마음에 드는 곳을 찾는 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ICBC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험료를 왕창 투척하고 차를 운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좀 당황스러웠다.
물론 조금 할인된 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더라. 무사고 기록을 보험사에서 발급받아 제출하면 되는데, 1년 단위로 5%가 할인된다. 8년까지가 된다고 하던데 그러면 40%는 저렴하게 비용을 지불할 수 있다. 나는 안타깝게도 회사에서 지급받은 차를 탔던 터라 무사고 기록을 보험사에서 내 이름으로 떼어줄 수가 없었다. 그냥 낸다 내…… 눈물을 머금고.
나야 갓 보험에 가입한 사람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보험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현지인들도 마찬가지더라. 독점으로 인해 발생하는 비합리성에 ‘울며 겨자 먹기’를 몸소 실천 중이라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종종 듣게 된다. 20년 넘게 무사고 기록 중이고, 무난한 D 중고차를 타지만 다달이 100불씩 보험료로 지불하고 있는 한 현지인, 10년 무사고에 이곳에서 일반적인 H 일본 차를 타지만 다달이 200불씩 내는 한 현지인. 이들은 그 책임이 아무래도 급속도로 늘어나는 슈퍼카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잘 보면 아직 숙련이 덜된 운전자들이 모는 슈퍼카들이 많잖아. 보험사는 한 군데고. 저런 차들이 사고가 나면, 우리 모두의 보험료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고.”
나야 아직 현지 사정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시각이 비단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닌 듯 하다. 기존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검소한 편이고, 어디서 보도 못한 비싼 차를 모는 분위기는 분명 아니었기 때문에, 도로 위를 씽씽 달리는 슈퍼카들에 약간의 위화감과 함께 보험료 상승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는 것 같더라. 그리고 실제 뉴스서도 슈퍼카의 과속과 재판 등에 관한 것을 꽤 자주 언급하곤 한다. 더불어 보험사의 적자 문제도 꽤나 심각해져서 이제는 재정위기 상태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매년 가파르게 보험료를 올림에도 이 적자는 줄어들 기미가 없는 듯하다. 최근 뉴스를 통해 확인해보면 9개월간 적자가 9억 3천5백만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아니, 돈은 있는 대로 뜯어가면서 왜 적자인 거야?)
구조를 잘 보면 그 현지인 친구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이긴 했다. 보험사가 하나다 보니, 그곳에서 모든 사고를 떠안고 처리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곳은 Rich몬드 아니던가. 진짜 엄청나게 좋은 차들이 내 앞뒤로 훨훨 날아다닌다. 최근에 가장 많이 보이는 차는 전기로 간다는 미래지향적인 T사 자동차, 가끔 야밤에 굉음을 내고 달리는 스포츠카 L, F 등과 영국의 B자동차, 손수 만든 차라는 R자동차 등이 자주 보인다.
그렇다면 저런 차가 사고가 난다면? 당연 보험사에서 보험료가 지급이 된다. 일반인 차 몇십 대 정도를 합쳐야 하는 가격인 경우도 있는데, 어마어마한 비용처리가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모두가 손잡고 함께 부담하게 되는 것. 뭔가 불합리하다. 왜 말도 안 되게 비싼 수리비를 지급해야 하는 사고까지 떠안아야만 하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검소하게 살아왔던 현지인들이 느끼는 감정? 당연히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다. 보험의 불합리함은 사고처리(이곳에선 injury라고 하더라.)에서도 드러난다. 클레임 센터에 알려서 보험처리를 하면 보험료가 급 상승하는 불이익이 있기 때문에 별 일 아닌 경우는 현찰 주고받기를 선호한다. 물론 이것도 말이 좀 통해야 하는데, 말이 잘 안 통하면? 어쩔 수 없이 보험사에 알리게 된다. 그리고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리치몬드의 한국인은 인프라가 중국인들만큼 잘 갖추고 살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중국인 상대로 자칫 잘못 걸리면-흔하다 할 수 없지만- 덤터기가 있기도 하다. 실제 친한 한인 지인의 경우, 가벼운 접촉 사고를 중국인 아저씨와 냈는데 아주아주 경미하게 범퍼만 살짝 찍힌 정도였다. 아무도 다친 이도 없었고, 정말 살짝 쿵. 상대방과 어차피 대화가 안되고 자신의 과실이라 보험처리를 하기로 했는데, 보험료를 갱신하는 와중에 황당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 달에 100불씩을 더 올려 내라는 것이다. 이유는 상대방이 대인 처리(injury)로 신청해서 돈이 훅 뛰었다는 것이다(상대방은 치료비 명목으로 추가비 수령.)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더란다. 이미 이런 사례는 꽤 있더라. '어쩔 수 없다.'
현지인 친구에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를 물었더니 나보다 더 침을 튀며 열을 내더라. 답답해 죽겠다며. 보험사가 검사도 제대로 안 하고, 비양심적으로 대인 처리를 해주는 의사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도 좀 문제라고 하더라. 점점 적자폭이 더 심해질 것이라며. 즉, 매년 오르는 보험료가 더더 오를 거린며. 그리고 ‘나는 이건 인종이나 출신 나라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 개인들의 문제지.’ 라 강조하면서도 기분 나쁘다는 건 감추지 못하긴 하더라.
요령이 좋은 것인지 솔직하지 못한 것인지, 이런 식의 대인 처리는 좀 너무 했다고 생각이 든다. 그냥 조용히 잘 살고 있던 작은 마을의 현지인이 느끼기에 크게 당황스럽고, 억울함도 좀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덧붙여 되도록 사고는 내지 않도록. 보험료 상승은 물론, 특히나 대인 처리가 무서워서라도 절대 천천히 운전을 해야겠다. 이방인인 나에겐 더욱더.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