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냐 배려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국서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요소 중 가장 큰 건 아무래도 간판에 있다. 중심가는 물론 곳곳에 중국어 간판이 자주 눈에 띄기 때문이다. 거리의 얼굴인 간판들이 그 도시의 분위기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 이곳은 중국어 간판들이 점령하다시피 했으니, 당연 중국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결과를 낳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전에 언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구의 45%에 가까운 수가 중국계열이니 자연스러울 수 있는 현상이긴 하지만, 항상 어느 나라 어느 시기에나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과하면 무엇이든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 중국어 간판이 지금 이곳의 가장 뜨거운 감자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중국어 100% 표기 간판은 시민들 사이의 갈등 유발자다.
“솔직히 좀 겁이 나는 건 사실이야.”
조상 중 누군가가 독일에서 왔다는 한 백인 친구(백인이라는 말이 썩 좋은 구별이 아니라, 자주 이용하고 싶지 않은 표현이다. 그냥 앞으로는 코카시안 계열 혹은 상대적 캐나다 현지인이라는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B는 중국어만 크게 쓰여있는 곳엔 절대 가지 않는다고 한다. 온 가족이 리치몬드에 자리 잡고 살아온 지 3세대에 이르지만, 어느새 슬금슬금 늘어난 중국어 간판들이 한편으론 좀 위압적으로 느껴진다고 한다. B의 대다수의 가족들이 모두 리치몬드에 살지만 중국인들의 상가를 피해서 이용하다 보니, 이용 지역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도 한다. 전에는 마음껏 다니던 지역들을 다니지 못하고,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다니게 되면서 불만이 쌓였나 보다. 그들은 중국어만 표기한 간판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이다.
마찬가지로 이 문제로 리치몬드 시의회와 당국은 무척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다. B처럼 기존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반발이 또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중국어 간판을 규제하자는 움직임도 있었고, 강제로라고 중국어로만 쓰인 간판을 부착하지 못하게 하자는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덕분에 의회도 몇 번이나 표결에 부쳐왔었다. 그런데 그 시도들은 번번이 무산되어왔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나? 여기서 표현의 자유와 정체성 및 비 중국계 인들에 대한 배려가 치열하게 대립 중이다. 아직까지는 늘 표현의 자유가 우선인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얼마 전에 가까스로 합의를 하나 이뤄내 발표하긴 했다. 기존 시민을 좀 배려하자는 입장인데, 이것도 권고사항 정도로 아주 많이 순화된 의견이다. 간판의 50%는 적어도 영어를 채우라는 내용인데,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인지라 법적 구속력도 없고, 지키지 않아도 그만이다. 그래서 기존의 시민은 시민대로 중국인들은 중국인들대로 썩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기색이긴 하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권고사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시청 앞에 영어 한마디 쓰여있지 않은 완벽한 중국어 간판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한참 시끄럽게 매스컴을 떠들게 했던 일 중에 하나인데, 다른 곳도 아니고 시청 앞이라 더욱 입방아에 오른 일이기도 하다. 이곳은 간판 말고도 사업 허가 관련 문제로 지금은 시정 조치에 들어가긴 했지만, 당시에 기껏 만들어놓은 아름다운 권고사항을 무시한 일이라 다들 분개했었다.
뿐만 아니라, 영어로 50%를 채우라고 했더니, 아주 눈에 띄지 않게 작은 글씨로 배경처럼 집어넣거나 잘 보이는 곳엔 중국어, 덜 보이는 곳은 영어로 써두기로 한다. 혹은 영어는 영어인데, 중국어의 병음으로 발음이 나는 대로만 기재한 경우도 볼 수 있다. 어떤 의미로는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희망사항인지, 조언인지도 어디까지나 간판에 한한 이야기이다. 광고는 또 별개의 문제다. 광고엔 더욱더 표현의 자유의 폭이 넓을 수밖에 없으니, 내키는 대로 그림을 그려도 글씨를 써도 되지 않겠나. 자유롭게도 다양한 중국어 서체들이 춤추듯 쓰여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작은 도시라 대중교통이 꽤나 발달한 편인 리치몬드에 자주 돌아다니는 버스, 스카이 트레인 등을 장식한 중국어 광고판에 대해서는 누구도 규제 혹은 권고를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방인인 나는 아무래도 그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다 보니 조금은 느긋한 듯 관조적인 자세긴 한데, 기존에 자리했던 일반 시민 입장에서 두려워할 만도 하다고는 본다. 나도 중국어가 영어보단 낯설기 때문인지 몰라도 중국어로만 표기된 곳엔 혼자 발길을 잘 안 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다고 또 이걸 강제로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끼기도 한다. 어느 나라에서든 모멸감을 주는 글이 아닌 이상 어떤 말로든 표기할 수는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한국의 영어로만 된 간판을 모두 불허하라!’ 이런 말에 아무도 공감하지 않을게 분명하지 않겠나.
혹은 여기와 일견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할지도 모르는 명동, 제주도, 건대 앞, 대림동을 보면서 약간은 무뎌진 면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 간판에 대한 푸념을 하는 이곳 현지 친구에게 한 번은 위에 열거된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한국의 중국어 간판사진을 검색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와우, 리치몬드! 리치몬드!”라는 반응을 보이더라. 거봐, 너네만 겪는 일은 아니다. 법으로 사람의 자유를 규제하는 것이 어디 그렇게 단순한 일인가? 어쨌든 이로인해 현지인 친구와 희한한 포인트에서 공감거리를 찾았다. 여기나 거기나 어쩔 수 없는 '리치몬드'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