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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태웅 Aug 16. 2017

밤이 쓰다, 밤을 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밤


어두운 밤을 머리에 쓴다.


퇴근할 때면 언제나 어두운 밤이 함께 한다. 까만 머리, 검은 셔츠, 검정 가방이 그대로 어둠 속에 동화된다. 잠시 몽롱해지던 그 순간, 전화가 울리고 환한 빛이 골목으로 들어선다.


환하게 라이트를 켠 야간 택시를 타고 길을 나선다. 빠른 속도로 어두운 밤과 멀어지자, 이윽고 밝은 밤을 마주한다.



창밖을 빤히 바라본다. 찬란하게 빛나는 빌딩과 빛이 춤추는 강, 두 눈 부릅뜨고 빛을 내는 자동차들이 밤을 밝힌다. 낮보다 화려한 서울의 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득해졌던 정신이 또렷해진다. 그럴수록 밤의 쓴맛이 강하게 느껴진다.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때면, 바쁜 업무 핑계로 외면했던 쓰디쓴 생각들이 밀려온다. 성취, 실패, 보람, 회의감, 과거, 미래가 한데 뒤엉켜 입에 담기 힘든 맛을 만들어낸다. 이 길에 대한 불확신과 주위의 기대가 나를 흔들고, 이 길에 대한 확신과 주위의 응원이 다시 나를 붙잡는다.


택시가 달리는 길에 따라 어두운 밤과 밝은 밤을 오고 가듯,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과 불확신이 오고 간다. 또렷해졌던 정신이 다시 아득해지고, 눈을 감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것은 행운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오면 시원한 계곡에서 헤엄치며 놀고, 추운 겨울이 오면 비료 포대를 썰매 삼아 경주하며 놀았다. 사계절 내내 주위의 모든 것이 놀이가 되었다.


수많은 추억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별이 빼곡한 밤하늘이다. 전봇대 불빛 하나 없는 곳에서 밤하늘을 바라볼 때면, 온몸에 어두운 밤을 쓰고 그대로 까만 하늘이 되는 것만 같았다. 택시의 불빛처럼 나를 어둠에서 꺼내 줄 빛은 없었지만, 두렵지 않았다. 그곳의 어둠은 따뜻했다.


추억에 잠긴 것도 잠시, 택시에 내려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밤이 다시 나를 반긴다. 굽이굽이 골목을 지나 어두운 방에 들어가니 선풍기가 고개를 돌리며 또 나를 반긴다.



씻고 나와서 책상에 앉는다. 탁상용 스탠드와 노트북 화면의 빛을 바라보며 쓰디쓴 밤을 곱씹는다. 뱉을 수 없다면 씹고 또 잘게 씹어서 목으로 넘기련다. 목 뒤로 넘어간 쓰디쓴 밤은 내 몸 이곳저곳을 지나 손가락 끝에 닿는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정신없이 춤을 춘다. 그렇게 쓴맛을 토해낸다. 그렇게 밤을 쓴다.


너무나 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은 사랑스럽다. 어둡지만 따뜻했던 시골의 밤이든, 낮보다 밝지만 차가웠던 서울의 밤이든, 쓰디쓴 밤 덕분에 가장 나다운 나를 대면할 수 있다. 사회의 누군가가 아닌 솔직하게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게 도와준다. 밤은 나에게 쓰지만, 몸에 좋은 그런 약 같은 존재다.


가장 나다운 나를 만나고 기억하기 위해, 이다지도 사랑스러운 밤을 쓰고 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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