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정반대까지 한류 열풍
하루 두 시간씩, 자유롭게 진행하면 됐습니다.
주의 사항은 딱 하나였어요.
"음. 특별한 주의사항은 없어. 아, 하나 있다. 학생들이 너를 유혹하려고 안달일걸? 하하! 여자 친구 있어? 있으면 내가 학생들에게 미리 경고해둘게."
수업 관리자인 안디가 신신당부한 경고는 다름 아닌 여자 조심.
워낙 한류 열풍이 뜨겁다 보니, 여학생들이 한국 남자에 관심이 많을 거랍니다.
듣고 보니 내심 기분이 좋았습니다.
약간 스타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농담이겠거니 했는 데, 그 현실은 이른 아침 캠퍼스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쳤습니다.
멕시코는 첫 교시 수업이 아침 7시부터 시작돼요.
한국에서는 9시 수업도 힘들어서 수강 신청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멕시코 학생들 정말 부지런하죠?
이사이아스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합니다.
저도 동생을 따라 부지런을 떨어보았아요.
한국어 수업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캠퍼스 안에 있는 카페로 갔습니다.
수업 자료도 정리하고 현지 학생 흉내를 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한 여학생이 다가왔습니다.
"저기, 옆에 앉아도 될까?"
저에게 따듯한 커피까지 사준 이 여학생은 두꺼운 전공 교재를 책상에 펼쳤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펼쳐놓기만 했어요.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페이스북 친구까지 맺었습니다.
그 순간.
첫 교시 수업에 갔던 이사이아스가 친구들을 데리고 카페에 왔습니다.
갑자기 수업이 취소됐다나. 그러곤 눈치도 없이 우리 테이블에 합석했습니다.
분위기를 눈치챈 이사이아스는 "여자 친구예요?!"라고 한국어로 놀려댔어요.
평소에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하더니, 이럴 때를 대비했나 봅니다. 하하.
어쨌거나 첫날부터 기분 좋은 출발을 끊었습니다.
한국어 수업은 하루 두 차례, 오전반과 오후반을 나눠 진행했습니다.
각각 한 시간씩 같은 내용을 반복했어요.
주제는 인사, 자기소개, 직업, 나이, 색깔과 같이 기본적인 것만 다뤘습니다.
학생들은 보통 열 명 남짓 모였어요.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며 수업하기 딱 좋은 규모였죠.
안디가 말하길, 지금이 중간고사 기간이라 참여도가 낮은 거래요.
평소 같았으면 의자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학생들이 왔을 거라며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 반, 한국 남자를 보려는 학생 반이 모여 시장바닥이 따로 없을 거래요.
그래서일까요.
수업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여학생이었습니다.
다들 수업에 엄청 적극적이었어요.
진짜 수업할 맛이 났다고 할까요.
그녀들의 활발한 리액션을 보면 마치 제가 스탠딩 쇼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학생들 중에는 매일 출석하는 단골도 있었고, 이따금 오는 철새 같은 친구도 있었어요.
덕분에 수업에 융통성이 필요했습니다.
지난 수업을 놓쳐도 이번 수업을 따라갈 수 있게 구성했어요.
그래서 교육과정이 잘 짜인 수업이라기보다는 특강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업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열정적인 학생들로 가득하죠.
또, 한글 낱말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기초 회화만 가르쳐서 단순했어요.
유일한 문제는 목감기였습니다.
며칠 정도 수업을 진행하고 나니 목이 칼칼한 게 아프더라고요.
학창 시절, 선생님들이 왜 목감기를 달고 사는지 실감 났습니다.
게다가 고산병까지 겹쳤습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곳 톨루카는 해발 2,500m에 있는 고산지대랍니다.
그것도 모르고 방과 후 학생들과 축구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숨이 안 쉬어지는 거예요.
아무리 들이마셔도 숨이 차고, 눈 앞이 하얘지고,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고산병이었어요.
완치 방법은 그냥 시간에 맡기는 겁니다.
특별한 약도 없고, 그냥 몸이 적응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여행하다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것도 없습니다.
특히, 혼자 다니는 여행에서는 외로움까지 덤으로 찾아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해지죠.
하지만 여기서 만큼은 아파도 행복하더라고요.
집에 가면 멕시코 가족이 있어 전혀 외롭지 않았습니다.
체크아웃 걱정도 없고, 다시 짐을 꾸릴 필요도 없었죠.
특히, 이사이아스의 어머니는 간식으로 먹으라며 도시락통에 과일도 싸주었고, 아침이면 따듯한 코코아도 만들어주었습니다. 마치 친아들을 대할 때처럼요. 드디어 아플 때 위로해주는 가족을 만났기에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