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겨울의 한 복판을 지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유리창 너머로 바깥세상이 온통 하얗다. 밤새 많은 눈이 내렸나 보다. 털 깎인 강아지처럼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드러내고 있던 나무 위에도 눈이 쌓여 있다. 옷이 날개라 더니, 눈 옷을 입은 나무가 멋진 외모의 신사 같다. 조금 후 거기에 햇살이 더해지니 온화함과 매너를 갖춘 품위 있는 신사가 된다. 너무 멋지다.
정작 나무는, 멋지게 보였던 허울이 다 벗겨져서 초라한 모습으로, 서럽게 시린 눈을 이고 있는 것이 버거울 텐데. 나무의 모습이 장년의 우리네 삶 같다. 평안하고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이루어 놓은 것도 없고, 젊은 시절의 능력도 없어지고,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는 늘어나서 버거운 우리네 삶.
다른 계절의 아름다움이 없어졌음에도 의연하게 겨울에만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선물하는 나무를 바라보고, 또 나를 바라본다. 주어진 힘겨움을 잘 안고 있는 나의 삶도 지금 내가 보는 풍경처럼 아름다울까?
내 삶의 계절도 겨울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모습의 나를 누군가 떠민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하냐고. 뭐든 해보라고. 새로운 것을 향한 발걸음이 얼음판을 지나는 것 같다. 살살 디뎌보지만 이내 내동댕이쳐진다. 이러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이런 유혹이 온다. 일어나지 말까? 다시 넘어질 텐데.
얼음판 같은 삶의 자리에서 대자로 누워 지나간 시간들을 본다. 지나간 시간들은 문창호 지를 통해 바라보는 것처럼 희미하다. 많은 감정의 색들이 제 색을 양보하고 파스텔 톤으로 바뀌면서, 슬픈 기억조차 예쁜 풍경이 된다. 산다는 건 어쩌면 피곤하고 힘들고 아픈 것이지만, 돌아보면 그 안에 크고 작은 사랑이 흐르고 타인을 통해 희망도 발견하는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의 풍경을 지나 축제 열린 하늘을 구경한다. 다양한 구름이 패션쇼 런 웨이를 걷듯 지나가고 이내 햇살이 흰 눈에 반사되어 춤춘다. 지나가는 새들이 찬 바람과 줄다리기를 한다. 거기에 연인의 속삭임 같은 햇살의 따스함이 더 해진다. 보고만 있어도 너무 좋다.
난 어느새 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현실은 소리가 나지 않는 고장 난 텔레비전 속 장면이 되고 상상은 나를 따스하고 유쾌한 곳으로 이끈다. 어쩌면 장년의 나를 지탱해 주는 건 추억과 상상이 주는 즐거움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에게 이런 상상력이 있다는 것도, 이런 상상력이 내 삶의 기쁨 중 큰 몫을 담당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상태에서 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알게 되었기에 어쩌면 진짜 고난이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상상력 덕분에 소박하고 작은 꿈이 생겼다. 눈 덮인 나무처럼 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주어진 것들을 잘 감당하면서 희망을 선물하고 싶다는 꿈.너보다 한심한 나도 겨울을 지나 봄으로 왔다고, 돌에 새겨진 것 같은 슬픔도 언젠가 따스함으로 덮어질 수도 있다고말해주고 싶다.
다시 일어나 보기로 한다. 추억과 상상의 즐거움을 간식 주머니처럼 가지고 있으니 좀 든든하다.
추억이 있고 타인과 얼버무려져 있는 희망이 있기에 겨울의 한 복판을 지나 봄으로 가는 과정조차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