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파는 매섭다. 삶의 겨울도 주기적으로 찾아와 매운맛을 보여준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의 전개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나가지 못하는 겨울 아랫목에 모여 이불을 덮고 들었던 옛날이야기처럼, 난 나에게 상상의 장면들을 들려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며 나를 칭찬하고 호호거린다. 그래서 난 나만의 세계에서 호호 아줌마다. 가끔은 그 호호 아줌마가 현실로 나와서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지만 어쩌면 그게 나인지도 모른다.
어릴 적 중국집에 가면 물에 식초와 간장을 섞어보고, 시계가 궁금해서 열어보기도 했다. 종이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버선을 만들어 신겨줬었다. 그냥 삐뚠 동그라미만 그리면 되는 버선만. 소심한 나는 딱 거기까지였다.
얼마 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중국집에서 다양한 비율로 섞어보라고 권했다면, 시계가 망가져도 되니까 분해해 보라고 했다면, 안 예뻐도 되니까 치마도 만들어 입혀보라고 도와줬다면.
지금이라도 호호 아줌마는 다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어린 나처럼 시도조차 못하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얼마 전 그림에 관심을 가지면서 인체 모형의 구체관절인형이 있다는 걸 알았다. 난 호호아줌마에게 그 인형을 사줬다. 호호 아줌마는 버릴 옷을 잘라 인형에게 옷을 만들어 입혔다.
난 호호 아줌마에게 박수를 보냈다. 감각이 있네~
난 요즘 나무를 눈여겨보며 다닌다. 벌써 몽우리를 내는 나무들을 보면서 봄을 생각했다.
호호아줌마는 이런 상상을 들려줬다.
한파주의보에 창문을 닫으러 갔는데, 벌어진 창틈으로 칼바람 소리가 들리는 거야. 움찔했어. 내 귀가 먹은 것도 아닌데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지르는지.
"너 나와. 한판 붙자."
머리를 굴렸지. 그래서 봄을 찾으러 간 거야.
처음엔 나가 싸워야 하나, 뭘 들고나갈까 고민했는데 질게 뻔하잖아.
봄이 어두운 구석에서 뭔가 열심히 하고 있더라고.
오호~~~
칼바람이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더라도 그냥 떠들게 나두기로 했어. 이제 곧 있음 봄의 멋진 웨이브를 볼 수 있을 테니까. 멋짐을 입은 봄을 상상해 봐. 벌써 설레지?
날이 좀 풀리고 바람이 좀 잠잠하길래 밤에 잠깐 산책을 했어. 다른 가지들에 비해 키가 큰 가지가 두 개 있는 거야. 뭔가 보려고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까치발 들고 있는 아이들처럼. 궁금해서 다가갔지.
아~ 서로 좋아하나? 그래서 얼른 왔어.
이 장면 때문일까? 멋진 사랑을 상상해 봤어. 나무의 사랑
작은 나무가 다른 작은 나무를 사랑했어. 그런데 그 나무가 가버린 거지.
남은 나무가 큰 나무 밑에 앉아서 우는 거야. 울면서 노래를 해.
'사랑의 조각들이 뺨을 스치면 넌 어느새 내 앞에 서있어...'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자꾸 생각나니까 이제 가버리라고. 그러면서 우는 거야.
'내가 바보 같아서. 너무 바보 같아서. 너의 귀를 안 담았나 봐.'
가버린 나무를 마음에 담아둘 때 귀를 안 담았는지 가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다 울고 나서 작은 나무가 알게 돼. 큰 나무가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큰 나무는 작은 나무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었거든.
누구도 완벽하지 않지만, 다 줘도 부족한 거 같은 마음. 큰 나무의 사랑은 그런 사랑인 거지. 감동적이지?
난 또 호호 아줌마에게 박수를 쳐줬다. 상상의 내용도, 허접하지만 그림 글씨와 편집도 마음에 든다.
학창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예체능을 열심히 할 거 같다는 얘기를 많이 했었다. 다음 생애는 없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 난 지금부터 나를 솔깃하게 하는 것을 다 해보려고 한다. 그림 글씨를 배우고 건반을 눌러보고 인형옷을 입혀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