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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Dec 01. 2023

기억의 저편

지나간 시간의 의미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러브스토리 영화 음악인 Snow Frolic이 흘러나왔다. 음악은 분명히 귀로 듣는데, 내 눈에는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공원, 여전히 눈이 오는데 눈 위에 누워 장난치는 주인공들의 행복한 모습이 보인다.

뒤 이어 흐르는 음악, 백조의 호수. 자연스레 내 눈앞에는 검은 발레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다. 디제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한순간에 나의 기억은 알고 있는 걸 펼쳐주며 그곳으로 나를 이끈다.


추수감사절 주일, 교회에서 찬양축제를 했다. 즐겁게 참여하다가 문득 작년에는 이곳에 없었다는 생각이 났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은 것처럼 나의 기억은 작년 아빠가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계실 때로 이끌었다. 거동이 불편하셨던 아빠 기저귀를 갈고 씻기느라 엄마가 애를 먹었던 그때. 주일 대예배를 드리고 나면 우린 아빠네로 향했었다. 찬양축제가 잘 보내드려서 너무 감사하다며 덮어두었던 슬픔을 들췄다.

난 소띠인 아빠를 닮아서 되새김길을 하나보다. 그때의 슬픔을 되뇌며 며칠 뒤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심한 감기를 앓고 나을 즈음, 이런 생각에 울면서 눈을 떴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가장으로 살아간 아빠의 기나긴 시간이 외로움 되어 내게 아픔으로 다가왔다.

"아빠 힘들지?" "우리 아빠 힘들어서 어떡하지?" 이 한마디만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난 아빠가 씩씩하고 용감하게 아빠의 무게를 잘 감당하길 바랐을 거다. 그래서인지 아빠는 한 번도 나에게 힘들다고,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간병하시는 여사님께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는데 나는 아빠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지 못했다.




우연히 꽃을 밟고 지나간 상상을 하며 직장 동료와 함께 이런 글을 적었었다.

 

나 때문에 아픈 너에게


널 아프게 한건 사고였어.

미처 널 생각하지 못했거든.

아프게 한 순간 아차 했지만

그땐 이미 지나쳐서.


예쁜 모습으로 웃고 있던 모습이,

나에게 밟히고 멍하니 날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껏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아.

바로 사과하지 못해 미안해.


우연히 꽃을 밟고 지나가는 것처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심코 한 말과 표정이 상처를 주기도 한다. 오늘도 난 나의 그런 모습을 봤다. 아빠에게 한마디를 못해서 아쉬움이 남는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한마디를 못한 것이 마음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기억의 저편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나는 가끔 낡고 허름한 스웨터처럼 왜곡되고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는다. 옥상에서 항아리 뚜껑을 가지고 상상놀이를 하던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약사로 다양한 분야를 기웃거린 그 경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동안 스치고 지나며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동안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재밌게 봤었다. 여성 댄서들의 경연 프로그램이다. 요즘은 '싱 어게인'을 본다. 무명 가수들의 경연 프로그램이다. 두 프로그램은 내게 비슷하다. 나를 표현하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된 결과물을 보면서 감탄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된 결과물은 아마도 그동안의 경험과 지식, 상처, 시행착오 등 모든 것이 녹아져 있는 과거의 결정체일 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처럼 뭔가에 의해 들쳐지면, 내 기억의 저편에 있는 많은 것들은 하나하나 의미를 찾을 거다. 그리고 언젠가 내 과거의 결정체가 보인다면 아마도 그건 부족하고 한심하지만 '사랑'일 거다. 가냘픈 여인의 손목처럼 부러질 듯 연약해 보여도 끊임이 없어서 신기하게 느껴지는 사랑, 상처 주고 상처받지만 훗날 돌아보면 사랑인, 그런 은은한 사랑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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