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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운

미국 대학 입시Ⅱ

by Claireyoonlee

남자는 아니 우리는 모두 엄마, 스승, 배우자를 잘 만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한다. 엄마와 배우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는 선생님을 만나려면 정말 ‘운’이 좋아야 한다. 나의 2번 아들은 ‘선생님 운’이 좋았다.


아이가 대전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다. 학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촌지 없는 사립 초등학교를 보내다가 선생님 호출에 놀라서 무언가 바라는 것인가 하고 학교에 갔다. 선생님은 아들이 노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닌다고 말해 주었다. 초등학교 때 전교 회장이었던 아이가 ‘노는 아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사춘기 아들을 이미 겪어 보았기에 침착했다.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는 모범생이었던 학생이 잘못된 길을 가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소정의 촌지를 하려고 했으나 선생님은 정색하며 받지 않았다. 손이 부끄러웠고 선생님의 진심 어린 걱정이 고마웠다. 나는 화내지 않고 아이를 조용히 타이르고 달랬다. 공산당도 무서워한다는 사춘기 중학생과 부딪히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엄마와 선생님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아이는 눈치를 보며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중학교에 들어가서 아이는 외모 꾸미기에 집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손질하는 데 거의 한 시간을 보냈다. 학교에 데려다주려고 아이를 기다리면서 나는 참을인 자를 몇 번 써야 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몰(Mall)에 가서 두툼한 반지를 샀다. 그 반지를 학교에 끼고 갔는데 무기를 가지고 왔다고 선생님이 엄마를 불렀다. 미국 학교에서는 폭력을 가장 경계한다. 동양 아이가 까만 머리를 한껏 세우고, 시커먼 옷을 입고, 조폭처럼 무시무시한 반지를 꼈으니 미국 선생님들이 경고를 줄 만했다. 나는 선생님에게 아이가 무기로 사용할 목적으로 장신구를 하지 않았음을 간곡하게 말하고, 다시는 무서운 반지를 끼고 학교에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아이는 우등상 대신에 최고의 헤어스타일상을 받아왔다.


아이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잘 치고 좋아했다. 피아노를 처음 가르쳐준 선생님은 재능이 있다고 전공을 시켜도 좋을 거라고 했다. 그녀는 어린 학생을 잘 달래기도 하고, 가끔 엄하게 야단쳤다. 아들은 6학년 때 쇼팽의 《즉흥 환상곡》을 연주했다. 미국에 와서도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 아르메니아 출신이며 프랑스에서 음대를 나온 선생님이었다. 동네에 명성이 자자해서 간신히 시간을 내주었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는 진정한 피아노 스승이었다. 그녀의 집 별채에서 아들이 레슨을 받는 동안 나는 가끔 옆에서 지켜보았다. 선생님은 피아노 기술보다는 음의 감각을 느끼라고 가르쳤다. 기본에 충실하고 작곡가의 마음을 이해하면서 연주하라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공부는 하지 않던 아이가 피아노 연습은 매일 했다. 꼭 30분을 하면 일어났다. 나는 그 30분을 생음악 카페에서 음악 감상하는 것처럼 즐겼다. 음악에 무지한 내 귀에는 어느 피아니스트의 연주와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들렸다. 1년에 한 번 연말에 피아노 선생님 제자들이 모여 음악회를 하면 아들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학부모들은 우리 애가 어려운 곡을 가끔 틀리며 연주해도 집중해서 듣고 크게 박수를 보냈다. 아들은 대학 입시에 보낼 CD를 만들기 위해 쇼팽과 리스트의 곡을 선생님과 함께 녹음했다.


미국 대학 특히 명문대에 입학하기 위한 전략적인 준비를 해주는 미국 대학 입시 컨설팅 학원(College Admissions Consulting)이 있다. 드라마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유능한 선생은 어마어마한 컨설팅 비용을 받는다. 사실 미국에서 대학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부모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이런 기관이나 개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사립학교에는 학생 하나에 전문 교사가 붙어서 가이드를 해주지만 학생 수가 많은 공립학교에는 바라기 어려운 현실이다.


큰아이는 미술 선생님 도움을 받아 미대 입시 준비를 했지만, 공부로 대학에 가는 둘째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소피아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아이들의 방황과 엄마로서 무력함으로 질질 짜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친구의 친구였던 선생님은 우선 큰아이 미대 입시에 쓴 에세이를 봐주고, 둘째 아이를 오라고 해서 공부시켰다. 형이 대학 들어가기 위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자극받았는지 선생님의 지도로 조금씩 학교 공부를 따라했다. GPA(grade point average)가 조금씩 올랐다. 미국 대학 입시에서는 고등학교 4년 평균보다는 성적이 점차 오르는 학생을 높이 평가한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이와 대학을 고르고, 공통 에세이(common essay)와 지원한 대학에서 요구하는 보조 에세이(supplimental essay)를 쓰는 것을 도왔다.


선생님 남편은 ‘가족 관계’를 연구하는 목사님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목사님의 온화하고 사려가 깊은 눈동자가 생각난다. 인간에 대해 관심이 많고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했던 유쾌한 분이었다. 그분은 아들과 나를 앉혀놓고 우리 가계도(family tree)를 만들어 자신에 대해 돌아보라고 했다. 아들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돌아보며 꽤 괜찮은 에세이를 썼다. 모든 에세이는 첫 문장이 중요하다. 목사님의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위한 반주를 할 때 어떤 노부인이 "내 마음을 터치한 네 손을 터치해보고 싶구나"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문장으로 시작해서 '피아노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처럼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고 싶다.' 뭐 이런 주제였던 것 같다.


아이는 실용음악 같은 음악을 공부하고 싶다고 연주 동영상을 찍어 보내면서 노력했으나 다행히(?) 음악 대학에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롤링 어드미션(Rolling Admission, 접수 순서대로 심사하고 결과를 빠르게 발표하는 전형 방식)으로 다른 주의 한 대학 공대에서 좋은 소식이 왔다. 아이는 좀 아쉬워했지만, 부모와 선생님이 적극 추천하자 그 대학으로 결정했다.


선생님과 나는 버지니아 숲길을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나의 미국 생활에 도움을 주고 좋은 친구가 되었다. 아이들의 장점을 나보다 더 잘 찾아내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조언했다. 어떤 유명 입시 컨설턴트보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위로를 해주었다.


인디애나주의 대학 캠퍼스는 강과 숲에 둘러싸인 학교 중심의 소도시였다. 아무 생각 없이 공부하기에 딱 좋아 보였다. 나는 아들을 데려다주고 오면서 끝없이 펼쳐진 옥수수밭을 지나갔다. 바람이 불면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는 초록색 바다 같은 장관이었다. 드디어 엄마 노릇을 반은 마쳤다는 생각에 해방감과 허전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제 나는 온전히 나의 삶에 매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나의 삶이기는 했지만.


어려울 때 나타나 도와준 귀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살아가면서 큰 교훈과 위안이 된다. 아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도움을 주는 ‘좋은 이웃’에게 감사하고, 자신도 누구에겐가 ‘귀인’이 되고자 노력한다. 아들과 내가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도운 모든 선생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http://blog.naver.com/yoonrhie/1008951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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