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산 대둔산 (2022년 8월)
집을 떠나본 지 오랜만이었다. 바이러스와 전쟁하느라 칩거하고, 회복 후에는 동네 산책만 했다. 버스 창으로 휙휙 지나가는 여전히 푸르고 푸른 들과 산을 보며 하루 동안이지만 여행을 떠나는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여행에 복귀하는 나를 축복하는 것처럼 하늘은 맑고, 해는 강렬하고 붉게 떠올랐다.
작가 김영하는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와 근거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어떤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부과해서 달콤함을 얻으려고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여행한다고 했다. 오래전 무형의 자산을 가진 사람(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 음악가, 철학가)은 자신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이 먹고 살기에 유리했기 때문에 여행했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사람을 현재로 끌어오는 것도 또한 여행이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일상의 고통을 잊고 새로움을 얻어온다고 했다. 작가는 경험과 책을 인용해 여행을 좋아하고 여행을 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다.
아무리 여행을 좋아해도 무더위 속 산행을 꺼리는지 휴가철 대둔산 도립공원은 한산했다. 자칭 ‘등산인’인 우리는 산의 중턱까지 가는 곤돌라를 탈까, 걸어서 올라갈까 망설였다. 시작하는 오르막 경사가 급했고 찐득한 습도로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스스로 고통을 부과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편함을 택했다. 거칠고 깊은 산세를 헤치고 곤돌라가 앞으로 나아갔다. 푸른 숲과 잘생긴 바위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쳐들어오는 사람들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10분도 되지 않아 우리는 쟁쟁하게 높은 바위산에 둘러싸였다. 틈을 비집고 자란 나무를 업은 거인 같은 바위가 우뚝 서 있다. 쉽게 오른 산에서 시간 부자가 된 우리는 주저앉아 지역 막걸리를 주인장이 금방 구운 파전을 안주 삼아 마셨다. 조금 가니 또 다른 넓은 주점은 곤돌라를 타고 쉽게 산에 올라온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허공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누런 주전자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고급 주점에 양주를 맡기고 마시는 단골손님처럼 이 산중에도 가끔 찾아와 자기 이름이 적힌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 마시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처럼 산에 둘러싸여 산에 매혹된 사람들은 아침부터 밥 대신 곡주를 들이켰다. 산에서 마시는 술은 술이 아니라 보약이라고 누군가 진지하게 말했다.
정상 마천대까지는 가파른 경사지만 단단한 철제계단이 놓여있어 비교적 빠르게 올랐다. 올라갈수록 산은 새롭고 신비한 모습이었다. 계곡을 잇는 ‘금강구름 다리’를 건널 때는 흔들리는 다리에 몸을 맡겨 같이 흔들렸다. 발밑에 까마득하게 떨어지는 “신묘한 여성의 문”(玄牝之門)인 계곡이 “미약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흘렀다.”(棉棉呵若存)* 계곡의 깊은 골에서 바람이 불어와 뜨거워진 나무와 우리를 흔들며 도닥였다. 여름은 아직 더위를 보내지 않고 나무와 풀을 조금 더, 조금 더 키운다. 선선한 바람에는 가을이 이미 들어와 있는데.
*노자 도덕경 제 6장
878m의 정상에서는 아스라한 구름 속에 지리산 같은 높은 남부지방의 능선과 야트막한 서부지방의 능선이 이어져 고요히 흘렀다. 그 흐름이 잠시 멈추는 곳 대둔산의 꼭대기에는 우리 땅의 위대하고 강력한 정기가 넘쳤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높은 곳에 올라서면 더워도, 추워도, 바람이 불어도, 눈비가 와도 산을 오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분명히 안다. 그 여행의 정점에서 말이 많은 친구는 온갖 미사여구로, 말을 아끼는 친구는 침묵하면서 가슴 깊이 감동을 새기고 다음 산행을 다짐한다. 나만의 “여행의 이유”를 꼽으며.
하산 길에는 사방에서 내려오는 물로 차올라 넘칠 듯이 쏟아지는 수락계곡을 지났다. 투명하게 흐르던 물이 절벽을 만나 하얗게 떨어졌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니 전신으로 찬 기운이 퍼져 온종일 쌓인 열기와 피로가 감쪽같이 식었다. 떠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듯이 버스 창밖으로 맑고 풍성한 물이 오래도록 따라왔다. 사람들이 여름의 끝을 잡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