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산 내연산 (2022년 8월)
내연산의 계곡은 굉장했다. 며칠 동안 내린 비로 부풀 대로 부푼 물이 신나게 흐르다가 막다른 곳에서는 함성을 지르며 추락했다. 물은 고요한 정지를 즐기다가 오염된 아래 세상을 거리끼지 않고 천진하게 또 흐른다. 여름 숲은 태양의 정기를 아낌없이 받아들여 키를 키우고 살찌워 만삭인 젊은 여인처럼 풍성하고 알찼다. 빛과 물의 기운을 충분히 받아 나무는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자라서 있는 대로 초록 잎을 내밀었다. 풀 한 포기조차 허술하게 자라지 않는 여름 산에서 우리는 오르막이 심하면 힘들다고 투덜거리다가 길이 평평해지면 편안하게 걸었다. 강렬한 햇볕은 나무 사이로 떨어지면서 부드러워졌다. 진초록색 숲 사이로 두 줄기 폭포를 보면 물줄기를 맞고 앉아있다고 최면을 걸어 땀을 식혔다. 태양의 열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여름 나무의 자태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걸음이 빠른 친구들이라 속도를 내어가는 재미가 있었고, 좀 일찍 하산하면서 송사리가 달려드는 물속에 들어가 알탕도 했다. 계곡 트래킹을 해봐서 계곡물이 두렵지 않았고 강원도 산의 물보다 흐름이 유연했다. 물이 흐르는 얕은 바위에 앉아 발을 담그면, 물의 속살이 어루만지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하산하여 막걸리 한 잔까지 완벽한 산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내연산행에서는 가물어서 폭포나 물을 즐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내연산을 완성했다고 할까. 비 예보에 아랑곳하지 않는 구름 덮인 하늘은 찌는 더위를 막아주었다.
다음 날, 산에 같이 갔던 친구 중 한 친구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 알렸다. 한 이틀 후부터 기분 나쁜 몸살이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아니겠지!” 생각했다. 원래 우리는 ‘나에게만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감염의 확률이 그렇게 높아졌는데도 말이다. 나의 면역력을 지나치게 자신했는지도 모른다. 이틀 후 자가 진단 키트로 검사해 보니 양성의 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틀 정도 찌르는 듯한 인후통과 몸살이 이어졌다. 오한이 나거나 자리에 드러눕지는 않았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괴이한 통증이었다. 내 몸은 바이러스에 대항해서 그동안 쌓아온 무기를 꺼내서 치열하게 싸웠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틀렸다. 몸과 마음은, 정신까지 하나임이 분명하다. 바이러스가 몸을 공격하는데 책을 읽지도, 글을 쓰지도 못했다.
어렸을 때는 툭하면 감기에 걸렸다. 편도선이 붓고 열이 오르면 엄마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며 밤새 찬 수건을 이마에 대주었다. 유치원은 거의 가지 못했다. 자주 결석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동네 친구가 아침마다 데리러 왔다. 눈이 크고 다정한 소년이었다. “윤정아 유치원 가자”하고 대문 앞에서 부르면 나는 아파도 괜찮은 척하면서 친구 손을 잡고 유치원에 갔다. 아팠다고 하면 예쁜 유치원 친구들이 따뜻하게 위로하고 말을 걸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열이 나면 엄마는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고 선생님에게 전화를 해주었다. 열이 오르내리는 미몽 속에서 다른 친구들은 교실에 갇혀 있는데 나는 “학교 안 가서 참 좋다.” 했다. 열이 내리고 회복하는 기운을 살살 느끼면 병이 나아서 기쁘면서도 관심을 잃겠구나 하고 아쉬웠다. 이번에도 아프다고 하니 가족들이, 친구들이 맛있는 음식을 보내줘 전쟁 중 후원품을 받은 것처럼 고맙고 마음이 따뜻했다.
참 오랜만에 내 몸이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다. 먹고 싶지 않아도 먹고, 열이 나면 해열제로 열을 내리고 잠을 잤다. 인후통은 골이 띵하도록 심해서 계속 차를 끓여 마셨다. 따뜻한 물이 넘어가면 잠시 목구멍이 편안해졌다.
열은 내렸지만, 목의 염증이 걱정되어 병원에 가려고 전화를 해보았더니 방문은 불가능하다고 하고 처방전을 SNS로 보내주지도 않았다. 하루 더 버텨보기로 하고 물을 많이 마셨다. 기분 나쁜 몸살은 계속되었다.
사흘째 아침 일어나 창밖을 보며 스트레칭을 하는데 기운이 났다. 몸과 정신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처럼 활짝 펴졌다. 목의 통증이 가라앉고 기침, 가래가 나왔다. 병원에 가서 항생제 처방을 받지 않아도 됐다. 물만 넘기고 싶었던 식욕이 조금씩 돌아오고, 괴상한 몸살기도 사라졌다. 내 안의 항체가 적 바이러스를 거의 다 처치한 것일까.
아직 증상 발현 후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검사하지 않았지만, 몸이 회복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동안 싸우느라 애쓴 나의 육체와 정신에 감사와 경의를 보낸다. 전쟁의 위기가 없도록 방비하고 짱짱한 무기도 쟁여놓겠다고 개선장군인 내 몸에게 결연하게 말한다. 삶과 죽음은 나의 뜻으로 결정되지 않지만,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나의 몫을 다할 것을.
PS) 바이러스의 전염력은 무시무시하다. 그러나 인간의 저항 능력도 만만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고 아플 만큼 아프면 적은 물러난다. 사람에 따라 그 시간과 정도가 다르겠지만. 지금 한창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환자들이 힘을 잃지 말고 잘 싸워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