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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기 없는 애인

28산 한라산 영실 탐방로 (2021년 5월)

by Claireyoonlee

한라산 백록담은 쉽게 볼 수 없다. 지루하고 험한 성판악 혹은 관음사 탐방로로 9시간 이상 올라가야 하고, 힘겹게 올라가서도 구름이 심술궂게 진을 치고 있으면 백록담을 보지 못한다.


백록담까지 올라가지 못해도 영실 탐방로는 한라산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짧고 수월한 길이다. 온갖 종류의 진기한 나무와 들꽃, 그리고 질 좋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듯한 청명한 새 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면 된다. 1.5km 정도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서 능선에 늘어선 삐죽삐죽한 돌상을 보며 오백나한과 설문대할망의 슬픈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한다. 엄마가 빠진 줄도 모르고 국을 먹은 499명 아들(마지막 한 그릇을 뜨다가 엄마의 뼈를 발견한 막내는 차귀도의 돌이 되었다)의 회한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처연하게 솟아있다.


요즘은 햇볕 좋은 곳에 털진달래가 진한 분홍색 꽃을 피웠다. 털진달래의 꽃은 앙증맞고, 줄기는 고산의 바람에 견디느라 구불구불하다. 인생사에 달관한 지혜롭고 고운 노인을 보는 것 같다. 조금 있으면 산철쭉이 여기저기서 불꽃처럼 타오를 것이다. 사스래나무의 이파리가 아직 나오지 않아 가느다란 줄기가 은 조각품 같았다. 정상의 작렬하는 햇빛을 받은 나무의 아름다운 뼈대는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슬쩍 수피(樹皮)를 만져보았더니 부드럽고 말랑했다.


구상나무는 빙하기에는 산 아래에서 자라다가 점점 산꼭대기까지 밀려왔다. 지구 온난화로 정상에도 얼마 남지 않은 이 나무는 더 이상 살아갈 힘이 없어 보였다. 지구의 기온이 점점 올라가고 눈은 충분히 내리지 않아, 나무는 목이 타서 조금씩 말라간다. 지구가 더워진다고 하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을 믿지 않을 수 없다.


빌 게이츠는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에서 탄소 배출량을 100% 줄여야 온난화를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산업화 이전보다 지금 지구의 온도는 섭씨 1도 올랐다. 기후학에서 1도는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510억 톤의 탄소량을 0으로 줄이는 일은 아무리 빌 게이츠라고 해도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목말라 죽어가는 나무들을 보니 그 꿈이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아빠가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올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화이팅’하고 인사를 했다. 어릴 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기 어렵다. 하지만 자연의 충만하고 활기찬 기운을 받은 아이의 마음에 아빠와의 시간은 보석처럼 남을 것이다. 방금 본 소년처럼 힘들다고 투덜대는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산을 갔던, 나에게도 보석 같은 시간이 생각났다. 갑자기 그때가 사무치게 그리워 나는 백록담 너머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다 오르면 고산 초원인 선작지왓이 홀연히 나타난다. 산 위에서 높게 자라지 못한 시로미나 조릿대 같은 관목과 풀들이 쓸쓸하게 퍼져 있다. 그 사이로 털진달래가 삐죽삐죽 꽃을 피웠다. 예전에는 이곳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소를 방목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밤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 유럽 몇 개국을 다닐 때였다. 스위스 알프스의 산 위 초원에는 처음 보는 들꽃이 수를 놓은 것처럼 피어있고, 목에 방울을 단 소들이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소가 움직일 때마다 딸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이들과 달력 화보 같은 풍경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선작지왓도 비슷했을 것이다. 방목은 금지되어 이제 소는 없지만 산 위 들판은 자연 그대로 고요하고 서늘했다.


윗세오름은 해발 1,700m에 있어 백록담과 거의 비슷한 높이다. 계단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쉽게 높은 산에 올라온 기쁨이 가득했다. 우리는 대피소 안에서 주먹밥과 오메기떡을 먹었다. 영실 휴게소에서는 아침 7시부터 주먹밥을 만들어 판다. 가볍고 맛있는 점심 식사였다. 다음에 오면 또 사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산해서 주인장에게 잘 먹었다고 특별히 감사 인사를 했다.


영실 탐방로를 혼자 왔을 때는 윗세오름에서 돌아갔었다. 이번에는 친구와 남벽 분기점까지 같이 가기로 했다. 백록담 남쪽 벽의 눈길이 무시무시했다. “백록담까지 절대로 올라가지 못해“라고 말하듯이 절벽은 험해 보인다. 암반이 무너질 위험이 있어서 한때 개방했던 백록담까지의 산행로를 폐쇄했다고 한다. 제주 공항에서 보는 한라산의 유연한 능선과는 아주 다르다.


비대면 시대이기는 하지만 산 위에서는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이야기를 나눈다. 어린아이들에게 잘한다고 칭찬해주고, 올라오는 모습이 힘들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금방 가면 된다고 용기를 준다. 거짓말인 줄 다 알면서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 기운이 난다. 온라인에서 얻을 수 없는 살아있는 정보를 주기도 한다. 돈내코 계곡 길로 내려가려 하는 우리에게 대피소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 길은 지루하고 돌이 많다고 말해 주어 왔던 길로 내려가기로 했다. 오후의 느슨한 해가 병풍 계곡을 비추어 돌의 굴곡이 선명했다.


영실 매표소에 내려와 240번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는 정류장 옆 숲에 있는 평상에 누워 버스를 기다렸다. 건드리면 파란 물이 쏟아질 것 같은 하늘 아래, 고운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버스가 늦게 왔으면 했다. 즉흥적으로 함께 온 친구와 호흡이 척척 맞아 더욱 좋은 산행이었다. 아쉽게도 버스가 시간 맞추어 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오면서 온종일 감탄한 한라산의 매력을 되새겼다. 영실에 몇 번째 오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 이 연인과는 언제쯤 권태기가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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