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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티 Jun 26. 2020

캔버라는 사랑을 싣고

넌 나한테 중요하지 않은데?!

라멘집은 정말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게였다. 실내는 약 20~30명 정도 앉을 수 있고 바깥은 1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가게였는데, 워낙 주변에 사무실이 많다 보니 점심시간에는 서빙 직원만 10명까지 일하기도 했다. 직원들은 모두 동양인이었는데 키친 직원은 모두 남성들, 바깥 서빙 직원은 모두 여성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사수 역할을 한 직원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태국인 직원인 J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중국인 직원인 Z였다. 두 명 다 나 보다 나이가 약간 많은 언니들이었는데 그 바쁜 와중에서도 내가 질문이라도 있으면 친절히 알려줬던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내가 한국인이라서 무작정 잘해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처음에 제일 힘들었던 건 사실 이들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었다. 당장 원어민인 호주 발음도 헤매었는데 거기다 태국어 발음, 중국어 성조까지 곁들여진 발음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 번은 J가 서빙할 라멘을 주면서 계속, "일레휀"으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엔 영어 이름인 "일레인"인줄 알고 "일레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J가 주문이 막 밀린 상태에서 다급했는지, 계속해서 "일레휀"만 외쳐대는 통에 나는 계속해서 도대체 "일레휀"이 뭐냐고 묻는 우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나중에는 답답했는지 펜을 가져오더니 숫자 11을 써줬다. 세상에. 일레븐이 일레휀이 되다니. 아무튼 그렇게 궁금증이 풀려서 둘이 와하하 웃은 뒤 아마 조금 불어버린 라멘을 숫자 표 11을 가진 손님에게 무사히 가져다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 2주 정도를 일하니 나름 일이 능숙해져서 서빙 외에도 천천히 다른 업무가 추가되어 버젓한 한 사람 몫을 하게 되었다. 점심 쉬프트는 물론, 바쁘지 않기 때문에 살짝 꿀알바 느낌이 나는 저녁 쉬프트도 받게 되어 차곡차곡 저금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투잡은 어림도 없는 바쁜 나날을 이어가면서 점차 시드니 생활에도 적응을 해갔는데, 어느 날 가게에 새로운 태국인 직원이 들어왔다.


사실 새로운 직원이 들어오는 것은 그렇게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워낙 바쁜 가게였기 때문에 적응을 못하고 금방 그만두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직원이 처음 일하면서 실수를 엄청 하길래, 오래 못하고 그만두려나 하기도 했다. 그런데 촐싹거리면서도 특유의 붙임성으로 생각보다 적응을 잘해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도움이 필요 없는데 자꾸 주변에 알짱거리면서 도와주겠다고 나서길래 조금 성가시기까지 했다.


거기다 알고 보니 같은 아파트 빌딩에 살고 있었다. 나보다 몇 층 아래에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출퇴근을 같이하게 되고 뭔가 친해져 버렸다. 기타 줄을 같이 사러 가거나 이 직원에 집에 놀러 가기도 했는데, 사건은 호주 최대 명절 중 하나인 부활절 시기에 터졌다.


당시 나는 캔버라가 호주의 수도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오페라 하우스가 시드니에 있는 줄도 몰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무지였는데, 그래서 겸사겸사 부활절 동안 가게도 문을 닫겠다, S는 연휴에도 일한다기에 혼자 캔버라로 당일치기 여행을 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날도 그 직원과 함께 기타 샵에 가는 길에 부활절 계획을 얘기하다 캔버라 여행을 할 거라고 얘기했다.


이 장소가 어딘지 정확히 기억이 나는데 굴번 스트릿에 월드 스퀘어 사거리에서 말로니 펍 맞은편이었다. 갑자기 그 직원 얼굴이 진지해지더니, "여행은 중요한 사람이랑 같이 해야 해. 나도 같이 가도 돼?" 이러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이 순간이 낭만적이었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한다라고 생각하시면 곤란하다. 그때 나는 그의 뻔뻔함에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에 그 순간이 생생하게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넌 나한테 안 중요한데?"


그 직원은 하하하 웃더니 다시 한번 같이 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래서 옛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생각으로 오고 싶으면 오는데 나는 그날 새벽같이 떠날 거니까 만약에 일 분이라도 늦으면 나 혼자 간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물론 그러고 그 직원은 그 날 아침 거의 30분을 늦게 나왔다. 망할 녀석.


캔버라까지는 시외버스인 그레이 하드를 타고 갔는데 가는 동안 직원이 가져온 아이패드로 이런저런 게임도 하고 눈도 붙이고 하다 보니 어느새 도착을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지도도 없이 캔버라를 도보로 누비면서 서로 참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나는 워낙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해서 뭐든 그냥 쉽게 쉽게 얘기를 잘하는 편인데 그 직원도 역시 조잘조잘 말하는 걸 좋아해서 서로 지루하지 않았다. 거기다 마냥 촐싹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화를 해보니 꽤 진중한 면도 있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그 직원 덕분에 좋은 사진도 많이 찍을 수 있었다.


즐거운 도보 여행의 끝으로 호주에 왜 오게 되었는지까지 얘기를 하고 나니 슬슬 집으로 갈 때가 되었다. 그래서 다시 그레이 하운드 승차역으로 걸어갔는데 어느샌가 캔버라 곳곳에 떨어진 형형 생생의 낙엽들이 아름다워 보였다. 또 완연히 익은 가을 정취에 취해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이것이 바로 지금 나의 파트너인 샘과 첫 만남이다. 진부하다고 생각해도 좋다. 원래 남의 연애사는 진부하기 마련이니까. 그 이후로 샘과 나는 연인으로, 또 인생의 동반자로 함께하고 있고 근래에는 프러포즈를 하기도 했다. 거기다 샘과 만난 가게를 통해 우리는 영주권을 받기도 했으니 신기방기 할 따름이다. 내가 글을 쓸 때나 뭔갈 하고 있을 때 정신을 놓고 뿅뿅거리며 게임을 하고 있는 샘을 볼 때면, 라멘집에서 실수를 한 뒤 잔뜩 핀잔을 먹고도 웃는 얼굴로 다가와 도와주겠다며 한사코 덤비던 녀석이 많이 컸구나 싶다.


아, 그리고 위에서 말한 망할 녀석은 취소. 이제 이 녀석이 망하면 나도 망하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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