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함부로 도와주는 게 아니다
나의 부상은 너의 부상
취업을 하고 나름 평화로운 시드니 일상을 즐기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함께 살던 셰어하우스 언니 중 한 명이 쇼핑센터에서 크게 넘어졌다. 바닥에 흘린 아이스크림을 미처 보지 못하고 미끄러졌는데, 다리가 밀리면서 한쪽 다리로 쿵 넘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중력이 완전히 실렸던 발목은 육안으로도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놀랄 만큼 퉁퉁 부어올랐다.
그런데 다치고 난 지 꽤 된 것 같음에도 계속 걷는 게 힘들어 보이고 치료가 제대로 진행되는 것 같지 않아 의아해하던 중 나는 문득 언니에게 쇼핑센터에 치료비를 청구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언니는 애초에 그게 가능한지도 몰랐다고 했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다쳤을 때 센터 직원이 왔지만 길 한복판에서 넘어진 게 수치스러웠던 나머지 괜찮다고 하고 거의 도망치듯 집으로 왔던 것이다.
사실 이건 해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이다. 또 외국에까지 나와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한 번에 집중시켰다는 데서 오는 당혹스러움에 도망을 쳤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호주의 경우,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의 책임은 기본적으로 업주에게 있다. 특히 이렇게 청소가 제대로 되지 않아 미끄럼 사고 등이 일어나면 이건 무조건 업주의 책임이다. 그래서 손님은 몸이 다쳤다고 사고 당시에 정확히 고지한 뒤 진단서만 잘 받으면 치료비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쇼핑센터 같이 큰 사업장의 경우, 제대로 사후 처리를 하지 않으면 법을 잘 아는 현지인들은 치료비는 물론 정신적 피해 보상까지 받아낼 겸 법정 싸움까지 하기 때문에 두말하지 않고 도움을 준다.
그런데 언니는 도움을 주러 온 사람을 일부러 '물리치고' 집으로 와버렸고 이미 사고가 난 지 거의 1주일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라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얘기를 하자 갑자기 언니의 눈에는 실낱같은 희망과 길 잃은 강아지의 애처로움이 깃들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나는 슬슬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에 눈치만 보고 있는 와중에 달갑지 않은 한마디를 듣게 되었다.
영어 잘하니까 나 좀 도와주면 안 돼?
비슷한 경험이 있는 분들은 저런 문장을 들었을 때 드는 곤란한 기분을 잘 알 것이다. 일단 듣는 순간부터 해결해봤자 본전도 찾기 어려운 이 문제를 해결할 궁리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래서 거절하고 싶지만 안타까움, 같은 셰어 생으로서 드는 인류애 등이 어쩔 수 없이 마음에 비집고 들어오면서 이런 감정들이 서로 마구 상충한다. 지금이야 이제껏 이런 부탁을 들어주면서 득 보단 실을 훨씬 많이 겪었기 때문에 융통성 있게, 어떨 때는 직접적으로 거절을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시에 나는 그런 인간관계 기술이 부족했다.
거기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언니를 비롯해 나와 S가 들어오기 전부터 살던 셰어 생들의 탐색전이 채 끝나기 전이라 서로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딱히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어째서인지 그때부터 언니의 부상은 나의 부상이 되었다.
싫든 좋든 내 일이 된 이상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쇼핑센터에 사고를 알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난 시기였던 데다가 도움을 주러 온 센터 직원에게 괜찮다고 한 게 화근이었다. 기억에 센터에 전화도 하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는데 다방면으로 연락을 취한 결과 우리에게 되돌아온 대답은 그런 사고는 기록이 되어있지 않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언니는 CCTV를 확인을 하려고 했고 나는 언니의 의사를 전달했지만, 한마디로 씨알도 안 먹혔다. 호주의 경우 CCTV 확인은 경찰을 대동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언니는 내심 내가 본인을 대신해 눈에는 쌍심지를 켜고, 팔뚝은 걷어붙이고 싸워주길 바라는 눈치였는데, 내가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할지언정 안 되는 걸 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끝내는 오히려 언니를 납득시키는데 더 진땀을 흘렸던 것 같다. 같이 함께 사는 마당에 얼굴 붉히기 싫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안될 것 같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다행히 언니도 수긍을 한 뒤 내게 고맙다는 말을 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했다.
이 후로도 나는 이런 종류의 부탁을 수도 없이 받았다. 특히 은행, 이민성(!), 이동통신사 등에 전화를 대신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았는데 이런 곳은 본인 인증 절차가 필수여서 직원들은 대리로 전화하는 걸 간파하는 매뉴얼을 다 숙지하고 있다. 그래서 직원의 덫에 걸려 대리 전화가 걸리기 일쑤였고, 정작 수치심은 직원에게 이렇게 전화하면 안 된다라고 혼나는 나만 받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적으로 이런 부탁은 해결을 해줘도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가 고마워하지도 않을뿐더러 해결이 안 되는 경우 괜히 서로 껄끄럽기만 한 딜레마 중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이런 부탁을 절대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거듭 느끼는 것이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가끔은 이기적이어야 할 때도 분명히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이런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는 것이 좋을까? 나의 부탁 거절 기술을 남기자면, 일단 상대방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는 척을 한다. 아이고, 고생하시네요. 속상하시겠어요, 아이고, 아이고... 본인 스스로 가식적인 모습에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일단 부탁 거절이라는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자. 그리고 상대방이 부탁을 하기 전 웬만한 큰 업체는 통역 서비스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호주 정부에서 운영하는 통번역 기관인 TIS의 존재에 대해서도 피력한다. 그리고 마지막 필살기는, "(나한테 부탁하지 말고) 해결 잘하시실 바랄게요!" 최대한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잊지 말자.
하지만 애석하게도 숙명적인 예스 피플이라서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주게 되었다면 일단 부탁한 사람의 신상명세를 모두 써놓는 게 좋다. 여기서 신상명세란, 여권 상 이름의 정확한 철자, 생년월일, 주소, 전화번호이다. 특히 주소의 경우, 우편번호까지 전부 다 써놔야 하고 은행이나 금융기관에 연락하는 경우, 비밀번호 및 본인 확인용 질문의 답도 모조리 써놔야 직원의 간파 매뉴얼이 먹히지 않는다. 역시 사람 속이는 건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하지만 일이 틀어졌을 때 겪은 수치심과 번거로움은 온전히 내 몫이다. 해외 생활의 기본 중 기본, 남 함부로 도와주지 않기를 오늘도 이 글을 쓰면서 마음속에 다시 깊이깊이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