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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윤 Jun 28. 2023

Here, There, And Everywhere



누군가에게는 그저 그런 화요일, 출근길에 잽싸게 엘리베이터 올라타서 [><] 버튼을 쥰내 누르려고, 뒤를 휘-봤는데 동료 1이 먼발치에서 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부르는 동료 2의 음성이 가까이서 들려온다. 동료 2는 인기척도 없이 내 그림자를 밟고 있었던 것이다. 근무개시를 5분 남기고, 겸연쩍게 셋이 나란히 들어가니까, [마징가 새끼들의 시간관념]을 엄호하듯 24님이 눈빛을 갈기는 것 같았다. (물론, 그냥 쳐다보신 건데, 내가 예민하게 느꼈을 수도 있음) 오후는 매섭게 휘몰아쳤다. 동료 1이 출근과 동시에 조퇴하는 일이 발생했고, 일복이 터져서 열심히 일만 했다. 오늘따라 업무성과도 좋은 편이라서, “회(먹자고 회)식 언제 하시졍?!”시전 하면서 하하 호호 노를 젓고 있었다.


그리고, 퇴근 시간에 이르자, 동료 1의 형제분이 돌아가셨다는 부고가 들려왔다. 출근길에 사이좋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건만, 퇴근길에 동료 1의 가족에게 인사하러 빈소를 찾았다.


  내 나이는 아직 죽음과 멀어서, 조문을 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얼추 또래처럼 보이는, 영정사진 속의 청년을 바라본다. 가는 길에 유튜브에서 #조문하는 법 2배속으로 설정해서 3번을 돌려봤건만, 장례식장 분위기에 멘붕 와서 향 피우는 거 생략하고 냅따 절을 시전 했다. 육개장에 밥 퍼먹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좌절했다. 한편, 동료 2는 눈물과 함께 밥을 삼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부터, 나의 시간도 비로소 느리게- 느리게-흐르고~있다. 드디어 슬퍼할 시간이 허락된 걸까. 마침 6호선 이태원역을 지나던 중이라서, 한 젊은이의 부고에 대한 슬픔은 가중되었다.




 고사성어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어머니의 슬픔을 뜻하는 고사성어가 있었다.

단장 斷腸 ; 창자가 끊어진다는 뜻으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처럼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말.

 [유래] 옛날 진나라 때 환온이라는 사람이 배를 타고 촉나라로 가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배를 타서 피곤했던 환온은 양쯔 강의 삼협이라는 곳에서 쉬기로 했어요.


“숲이 우거져서 참 멋지구나.”

“잠깐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환온의 시종이 배에서 내려 숲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곳에는 새끼 원숭이들이 숨어 있었어요. 시종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품에 안고 배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배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끼끼 대는 소리가 들렸어요. 바로 새끼 원숭이의 어미였지요. 어미 원숭이는 강둑을 따라 계속 배를 쫓아왔어요.

“저러다 말겠지. 어서 가세.”

사람들은 더 빨리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갔어요. 하지만 어미는 끝까지 배를 따라왔고, 마침내 배 안으로 뛰어들어 새끼를 껴안았어요. 하지만 그 순간 어미 원숭이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답니다.


“별 이상한 일도 다 있군. 왜 죽은 거지?”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은 죽은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 보았어요. 놀랍게도 배 속의 창자가 툭툭 끊어져 있었어요. 새끼 원숭이를 잃어버린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졌던 거예요.

“이럴 수가! 단장됐잖아. 창자가 끊어지다니!”

그 뒤 사람들은 몹시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단장의 슬픔’이라고 부르며 서로를 위로했어요. _ 네이버 백과사전_출처_




  백과사전 읽다가, 자식 잃은 곡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느리게 가는 6호선에서는 나도 모르게 때늦은 눈물이 느리게-흐른다. 슬픔을 나누면, 속수무책으로 슬픈 사람이 되니까 그 상황을 회피하거나 애써 모면하는 법을 택할 수도 있겠다. 한편, 고여있는 감정은 위태롭고, 슬픔을 기꺼이 나누는 게 사랑의 방식일 수도 있겠다. 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가슴에 뭍는다.는 게 어떤 건지 가늠조차 안 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서투른 애도를 표해본다.








 

인간은 저마다 다르게 슬퍼한다. 그리고 모든 슬픔은 언제나 두 가지의 차원을 가진다. 개인의 차원과 공적인 차원이 그것이다. 개인 차원은 애도작업의 은밀한 부분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것이 고인과의 인연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보았다. 이는 강제된 이별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용인하는 태도이다. 바깥에서 볼 때, 이 시기의 당사자는 흔히 경직된 것처럼 보인다. 남은 사람은 황망한 눈길로 전후 사정을 살피며 비극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거나 자신의 책임으로 끌어안는다. 최선은 용서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야속하게도 죽어서 나를 홀로 남겨둔 고인을, 여전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을, 희망하건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속에 있는 모든 말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도 못했으니까, 아무튼 줄곧 "왜?"하고 묻는데 아무리 따져보아도 속 시원한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쨌거나 무거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부모 자식도, 직장 동료나 친구도, 심지어 배우자마저도 이 '애도작업'을 대신해줄 수 없다. 얼어붙은 시간 끝에서 얻은 깨달음은 아무도 이런 것이지 않을까,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나 물건은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 시기에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은 섣부른 위로를 베풀려 하지 않는 마음가짐의 소유자다. 이들은 "모든 게 잘될 거야"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곁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며 우리의 슬픔에, 모든 미움과 서운함에, 사랑과 두려움에 귀 기울여준다. _ 책_ 존재의 박물관_스벤 슈틸리히_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이상한 발작 버튼을 깨닫는 계기였다. 좋지 않은 시기에도 내가 이상하리만치 과하게 밝게 행동하는 버튼을 누른다는 것. 내가 느끼기에 제일 위로가 됐던 말은 묵묵히 들어주다가 친구가 건넨 말 한마디


그래,
산 사람은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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