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난 이랬나.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술을 먹고 있었지. 무슨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쟤 뭔가 나 좋아할 것 같다. 근데 재미가 없네. 집? 안 가. 거길 왜 가. 재미도 없는데. 따라오라고? 내가 왜?
즐거우면 좋은 거 아닐까. 여태까지 너무 우울했으니 난 좀 즐거워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매일 누군가와 술을 마시고 놀았다.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친구의 친구. 낯선 동네니까 아는 사람이라도 많아야지. 매일 떠돌아다니다시피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면 같이 소리를 지르고, 내가 토악질하면 누군가 내 등을 두들겨주고, 나는 또 두들겨준 애 이름이 기억이 안 나고. 괜찮아. 재미있었으니까. 잠들지 못한 나의 하루는 어느새 유흥으로 물들어갔다. 다행히 아르바이트는 빨리 구해졌다. 월세를 내기 빠듯했으나 밥을 먹지 않았으면 놀 돈이 있었다. 우리는 싸게 술을 먹기 위해 공원에 앉아 소주를 들이켰다. 누구 하나 사고를 치면 걔 하나 빼고 뒷담을 깠고, 누구 하나가 술을 사면 걔 하나를 둘러싸고 모여 박수를 쳤다. 매일 박수 같은 하루였다. 박수를 치면 칠수록 손바닥이 쓰렸지만 괜찮았다. 즐겁잖아. 그럼 된 거야.
캘린더가 빈 날을 참지 못해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돌리고 돌리다 보면 누군가 하나쯤은 나와서 놀아주었다. 집에 가기 싫은 날에는 애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첫차 타고 가자며 조르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 애들은 못 이기는 척 함께 있어 주었다. 집에 들어가 봤자 좁아터진 그곳에서 잠도 못 잘 바엔 노는 게 나았다. 웃자. 웃으면 즐거워. 가시적으로 들려도 웃어야 해. 머릿속에서 그 말이 윙윙 울렸다. 술병을 돌리고, 딱밤을 때리고, 서로 술에 못 이기는 척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럴 때마다 하나의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즐거워?
내가 웃음으로 무언가를 흘려보낼 때마다 태호와의 관계는 꼬여만 가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달라진 게 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만나면 담배를 피웠고, 게임을 했고, 입을 다문 채 카페에 앉아 테라스 밖을 바라보았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개 같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면 담배를 피웠다. 재떨이가 가득 찰 때까지 담배를 피우고 있자면 속 안이 담배 연기로 메꿔지는 기분이 종종 들었다. 나는 담뱃갑을 열고, 태호는 게임을 하고. 라이터 부싯돌 마찰음을 들을 때마다 이따금 묻고 싶은 말들이 늘었다. 태호야, 그래서 넌 행복해? 묻지 않는다. 나는 묻는 것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동시에 나는 무언가를 묻어버리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봐주자. 종종 태호에게 얘기를 꺼내고 싶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짓이겨 끄며 카페 밖으로 나가면 태호는 항상 내게 말했다. 오늘도 재미있었다, 그치?
태호는 친구. 친구니까. 태호는 나랑 친구야. 맞아, 우리는 친구니까. 그런데 태호야 표정이 왜 그래? 다른 내 친구들과 만난 태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자기도 다른 친구를 데려왔으면서 내가 다른 친구를 데려왔다는 이유로 우리는 같은 자리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내 친구들과. 태호는 태호의 친구와. 섞이지 못하는 우리의 친구들이 마치 나와 태호 같아서 나는 모른 척 잔을 부딪혔다. 생각하기 싫은 날에는 그냥 놀자.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 더 이상 잃어버릴 것들이 없잖아. 입으로 짠 소리를 내면서도 태호에겐 잔을 들이대지 않았다. 내 친구가 태호에게 말을 걸 때마다 태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버리고는 자기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태호의 친구는 낯가림이 심했다. 심했나? 그들에겐 그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굳이 껴서 놀고 싶지 않은 우리는 우리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곤 서로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기분 나빠. 기싸움하는 거 같아서 더 기분 나빠. 그럼 나는 애들에게 술잔을 들이댔다. 애들아 짠하자! 태호는 하지 않는다. 태호의 친구도 하지 않는다. 태호는 나와 놀지 않는다. 나와 태호가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고 있다.
속에 불이 쌓여간다. 불을 끄는 법을 알지 못하는 나는 알코올을 쏟아붓는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장난스레 뒤통수를 친다. 아 씨발 모르겠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부유한다. 겉돌다가 허공을 떠돌아다닌다. 나는 어디론가 가고 있다. 친구와 친구의 친구와 친구의 친구의 친구와 함께 어깨동무한다. 우리는 마이크를 잡는다. 우리는 테이블에 올라간다. 우리는 춤을 춘다. 우리는 소리를 지른다. 누군가 내 뺨을 만진다. 만진다. 아. 누구였을까. 두 개의 얼굴이 나타난다. 두 개의 얼굴이 겹친다. 얼굴은 남자였다가 여자였고, 입이 컸다가 입이 작아진다. 실루엣이 완전히 겹치자 얼굴이 보인다. 과외쌤이 눈앞에 나타나서 말한다. 너는 괜찮니?
쌤이 왜 여기 있을까요? 저는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선생님. 저는 모르겠어요.
과외쌤은 안쓰러운 얼굴로 내 손을 어루만지며 몇 번이나 내 상태에 관해 물어봐 주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과외쌤은 그런 나를 마주 보며 기다려주었다. 재수생이 이러고 놀아서가 아닌 정말로 애가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기에 나는 과외쌤 앞에서 어떻게 놀았는지는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도 과외쌤은 금방 나의 스트레스를 알아챘다. 너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온몸이 부어. 정말로 즐겁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노는 걸 포기하지 못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하지만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에 관해 묻는 질문이 오랜만이라서일까. 과외쌤 앞에 서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매번 볼 때마다 눈물을 훔치니 과외쌤 앞에 설 면목이 없었다. 그런 날이면 과외쌤은 나에 관해 물어봐 주었고,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 조심스레 말을 꺼냈고, 끝내 안아주었다.
한심한 내가 신물 나게 싫었지만 멈추는 방법을 모르는 나는 폭주 기관차처럼 노는데 정신이 없었다. 훗날 그게 전부 ‘조증’의 증상이란 것을 알았으나 그때 알았다고 해봤자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죄책감이 쌓여갔다. 술을 마신 뒤 집에 돌아오면 항상 죽고 싶다는 말을 난발했다. 정말로 죽고 싶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죽고 싶지 않았으나 누가 나 좀 죽여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차오르는 이 고양감과 흥분감을 쓰레기통에 버릴 방법을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 기분이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 내게 있어 소스라치게 두려운 부분이었다. 세상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내 몸조차, 내 기분조차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억울함에 매일 침대를 발로 찼다.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으면서도 멈추지를 않았다.
술을 퍼먹자, 웃음소리가 방안에 울리면 행복해질 거야. 네가 웃으면 나도 웃게 될 거야. 매일 웃음으로 보내자 그러면 나는 더 이상 죽고 싶어지지 않을 거야. 우리 슬픈 이야기는 그만하자. 안 그래도 슬픈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해. 우리 가볍고 즐거운 이야기만 하자. 그러다 우리가 헤어지는 날이면 오면 서로 안녕, 하고 손을 흔들어주자. 우리 굳이 이름은 묻지 말자. 나는 너의 익명의 A씨가 되고 싶어. 술에 취해 흐린 눈으로 나를 봐줘. 그러면 내 얼굴이 보이지 않을 거야. 굳이 내 얼굴을 볼 필요가 없잖아?
웃는다. 웃는다. 웃는다. 아빠에게 웃는다. 엄마에게 웃는다. 동생에게 웃는다. 친구들을 보며 웃는다. 같이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에게 웃는다. 이름 모를 친구들을 향해 웃는다. 술자리에서 웃는다. 나를 보며 웃는다. 태호에게 웃는다. 아? 태호에겐 웃지 않았구나.
나는 태호에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다. 대화하고 싶은 날이 많았지만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지 몰랐던 나는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냥 모든 게 미웠다. 불만은 많았으나 나오지 못했다. 우리는 같이 놀았고, 같이 웃었고, 같이 밤을 새웠고, 같이 대화를 나누었지만 제대로 된 대화가 되지 않았다. 무언가 꽉 막힌 것, 마냥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서 미웠다. 그래서 미안했다. 미워해. 미안해. 미워해. 미안해. 미워해. 미안한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한 곳에 있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제는 웃고 싶지 않아서 과외쌤에게 찾아갔다. 과외쌤과 나의 관계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입시보단 심리상담에 가까웠고, 과외쌤은 내게 있어 유일한 어른이었다. 과외쌤에게 많은 짐을 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른 척하고 싶었다. 과외쌤마저 없었다면 나는 정말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제발 입시가 끝나도 제 곁에 있어 주세요. 치킨집에 간 우리는 먹으라고 나온 치킨과 맥주는 먹지도 않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호를 좋아하지만 뭔가 답답한 감정이 든다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준 과외쌤은 이상하단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정말 태호를 좋아하니? 왜 네 표정은 좋아하는 친구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닌 싫어하는 친구에 대해 말하는 거 같지?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태호를 싫어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가 더 이상 가깝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태호를 좋아한다. 처음으로 가깝게 사귄 친구니까. 나는 태호를 싫어한다. 그렇게 겨우 한 살 많다고 권위적으로 누르는 게 아빠 같아서 싫었다. 나는 태호를 좋아했다. 그 긴 밤을 같이 보내준 친구니까. 나는 태호를 싫어했다. 우린 영원히 가까워질 수는 없을 것 같아. 감정은 내게 있어 늘 어려웠다. ‘좋아한다’와 ‘싫어한다’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아빠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했고, 태호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싫어했다. 아 나는 그 차이를 알고 싶지 않아서 회피했다. 내 감정을 마주하고 보는 게 어려워 유흥에 빠져 생각을 없앴다. 자, 이제 회피는 그만해야지. 하지만 노력하는 법을 모르는 나는 어떡하죠. 미안해. 태호의 연락처를 차단했다. 싫어한다는 감정으로 태호를 덮었다. 관계를 개선하고 이어갈 줄 모르는 나라서 마주할 자신이 없어 또다시 도망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