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남자 매거진에 올리는 글은 소설도 아니고 실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제가 매일 꾸는 꿈들 중 기억에 남는 것들을 매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살을 붙여 초단편 소설처럼 써 보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요.
수많은 좀비 무리들이 보인다. 아직 물리지 않은 생존자들과 함께 등을 맞대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놈들을 향해 총을 난사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놈들의 수가 너무 많다. 생각해 내야 한다. 저것들을 모두 당해내기엔 무기가 부족하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옥상에서 구조를 기다리자.'
그곳은 공사를 하다 만 어느 건물이었다. 썩어서 뼈만 남은 저 송장처럼 이곳도 겨우 골조만 남아 있다. 외벽이 없기에 밖의 상황이 훤히 보였고, 이따금 질주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건물 외부로 추락하는 좀비들도 있었다. 우리에겐 잘된 일이었다. 좁은 계단 위에서라면 승산이 있을 것 같아 동료들과 함께 재빠르게 계단으로 이동했다. 고맙게도 좀비 무리가 서로 밀치며 난간조차 없는 계단에서 계속 굴러 떨어졌다.
함께 싸우고 있는 생존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인종이 다양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쓰고 있는 말도 한국어가 아닌 것 같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 외계인과도 소통할 수 있는 게 꿈이니까. 나의 모습을 거울로 명확히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동양계임은 분명했다. 느낌이 그랬다. 손에 든 무기도 확인해 보았다. 전기톱이었다. 총보다 박력 있고, 오래가는 무기. 이거야말로 남자의 무기지.
우리는 좀비들을 어느 정도 따돌리고 생존자들과 함께 위층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어느새 5층, 그러나 우리는 실망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너진 천장에서 쏟아진 돌무더기들 때문에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와 함께 유일한 동양계였던 한 남자가 제안했다.
“저기 보이는 저곳 말이야. 판자를 뜯어내면 인부들이 공사할 때 사용하던 수동 승강기를 이용할 수 있을 거야.”
모두가 동의했다. ‘짜식. 아시안 파워를 이런 식으로 보여 주다니.’ 괜히 내가 으쓱해져 전기톱의 시동을 걸고 앞장섰다. 녀석이 말한 승강기가 보였다. 판자를 뜯어내려는 찰나, 등줄기가 오싹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너무 조용하면 꼭 뭔가 튀어나오던데. 아니나다를까 누군가 '그 대사'를 외치고 말았다.
“잠깐만, 여기 이상해. 너무 조용하잖아.”
그러나 동양계 남자는 신경쓰지 않고 판자를 난폭하게 뜯어내기 시작했다. 한 명씩 들어갈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야 녀석은 멈췄다. 승강기 안은 마치 다른 차원을 품고 있는 듯 생각보다 넓었다. 깊은 어둠만 존재할 뿐이었지만 깊고 고요하게 울고 있는 바람소리로 알 수 있었다. 나와 녀석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왔다. 서너 명쯤 들어갔을 때였을까? 무언가 느껴졌다. 바람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그리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비로소 조금씩 들어오는 구부정하게 서 있는 실루엣들이.
“총 들어! 놈들이 숨어 있었어! 밖으로 빨리 다시 나와!”
나는 땅에 잠시 내려놓은 육중한 전기톱을 뽑아 들고, 시동 줄을 잡아당겼다. 굉음을 내며 돌아가기 시작하는 전기톱을 들고 놈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미 들어갔던 동료들 중 마지막 동료가 나오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팔이 쑥 나와 그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어둠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이윽고 들리는 동료의 끔찍한 비명과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는 소리, 그리고 먹잇감을 기다리는 나의 믿음직한 전기톱 소리.
좁은 승강기 문을 사이에 두고 어둠 속의 놈들과 대치하는 동안 오직 침묵만이 있었을 뿐이다. 몇 초가 지났을까. 갑자기 어둠 속에서 수십의 좀비 무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전기톱으로 최전선에서 신나게 좀비들을 썰어 버리는 동안, 동양계 남자는 놈들의 미간에 총알을 한 발씩 박고 있었다. 우리 꽤 괜찮은데?
“이제 더는 총알이 없어.”
총알이 거의 떨어졌지만 다행히 놈들도 몇 남지 않았다. 키만큼이나 높이 쌓인 시체들 때문에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그르렁거리는 소리들이 별로 들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지원 사격을 하고 있던 생존자 중 하나가 갑자기 사격 중지를 외쳤다. 피칠갑을 한 놈들이 여전히 다가오는데 누구도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사격이 중지되지 않자 녀석은 갑자기 무력으로 사격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좁은 문 덕분에 잔당들이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슨 짓이야?!”
“저 좀비가 입고 있는 옷, 저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야. 진짜 구하기 힘든 거라고. 총알 자국 나면 절대 안 되니까 생포해서 옷만 벗기게 해 줘.”
“응?”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일까.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지금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상황 아니었나? 이 정신병자 같은 새끼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급기야 녀석은 사격을 방해하기 위해 좁은 문을 제 몸으로 막기 시작했다. 동양계 남자와 나는 뭐하는 짓이냐며 그를 떼어 내려고 해 봤지만, 물욕에 미쳐 버린 녀석의 힘은 좀비보다 강했다. 녀석을 방패 삼아 좀비가 하나라도 나오게 되면 우리 쪽의 손실도 클 터였다.
전쟁에서 적군보다 무서운 건 무능한 아군이란 말이 떠올랐다. 동양계 남자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전기톱을 내려놓고 그 정신 빠진 녀석을 냅다 발로 차서 승강기 안으로 밀어넣었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옷이 그렇게 좋으면 혼자 들어가!”
녀석의 표정에 공포와 환희가 번갈아 나타났다. 그리고 녀석은 살점이 뜯기는 와중에도 좀비에게서 옷을 벗겨내려 애를 썼다. 죄책감은 없었다. 오히려 묘한 통쾌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꿈에서 깨었는데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