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늘과 접점이 많았던 책 후기
<그 개와 혁명>은 작가 예소연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타보지 못한 문학상, 그 문학상에는 어떤 작품들이 있나 궁금해서 사본 것일지도 모른다. 동경과 질투 그 사이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제목이었다.
개가 무슨 혁명을 일으킬 수 있을까? 혹시 작가님이 좋아하는 두 단어를 붙여 만든 걸까. 나는 고양이를 키우고, 잠자는 걸 좋아하는데. 그럼 내가 지을 수 있는 제목은 <그 고양이와 수면>, 정말 정적이고 고요한 단어의 조합이다. 그런데 개와 혁명이라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발랄한 개가 어떤 혁명을 일으킬지 궁금해졌다.
태수 씨. 태수 씨를 부르며 시작하는 이 소설은 아빠를 태수 씨라 부른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려준다. 마치 내가 엄마를 쑥이, 아빠를 환이라고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르는 애칭처럼 말이다. 내가 머리가 더 크고 나서야 엄마, 아빠를 하나의 사람으로 볼 수 있었다. 나중의 일이다. 작가님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름 부르기.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작고 다감한 의지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요”
태수 씨는 아픈 아빠를 위해 고모가 지어준 두 번째 이름이다. 아니지, 원래 이름, 가족이 생기고서 붙은 이름 아빠, 그리고 더 오래 살길 바라며 받은 이름, 태수.
운동권이었던 아빠와, 운동권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사회 운동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젊은 여성들. 둘의 세계는 이어져있다. 아빠의 죽음으로 딸은 아빠의 '지령'을 수행해 나가는데, 그 지령은 딸을 응원하는 아빠의 마음이 배어 있다.
그 마음이 생전부터 잘 이양되었기 때문에 주인공은 상주가 되었을 것이다. 완장을 차고, 장례식장의 손님을 받고. 그리고 마침내는 금기시되는 새 식구, '유자'를 장례식장에 데려오고 마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보적인 사상, 그것이 너무나 작은 진보일지언정, 우리 여성 개인에게는 큰 변화가 될지도 모르는 그 발자취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의 연대가 있었다.
딸만을 자식으로 가진 사람은 부모님의 빈소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 대신 사랑하는 동물이 있다면 어떻게 가정을 영위할 것인가. 그런 고민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나아질 것 같지 않던 세대 간의 차이, 성별이 달라 알 수 없었던 어떤 고통은 모두 사랑으로 봉합된다.
그 개, 그러니까 새로운 가족 구성원인 개를 장례식장에 데려오는 것은 혁명이다. 그 조그마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의 배후는 사랑이다. 나의 아빠는 운동권도 아니고, 나와는 좀처럼 다른 생각을 하시곤 한다. 그럼에도 아빠는 늦은 밤 부산역에서 이상한 아저씨가 쫓아왔을 때 불같이 화를 냈다.
고양이는 정이 없어서 별로라고 하던 나의 아빠는, 내 고양이 유자와 솜이를 데려왔을 때부터 또 하나의 자식으로 보살폈다. 애들이 아픈 밤이 오면 밤잠을 반납하고 걱정하고, 어느 순간 길고양이를 마주할 때도 사진을 찍어 내게 보내셨다.
혁명적인 것들은, 다소 날 선 것처럼 보여도 다 서로를 사랑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아빠의 지갑을 열어보곤 요즘의 시대엔 무슨 말이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나 싶어 눈물이 났다. 아빠와 늘상 뉴스를 보면서 날을 곤두세우는 우리지만, 나는 아빠 지갑 1등석을 차지한 딸이다.
뉴스만 봤다 하면 요즘 세상엔 왜 이렇게 비수 같은 말들이 많이 오가는지. 침묵의 비수도 왜 이렇게나 많이 흩어져있는지.
창환 씨, 중요한 것은 제도야.
사랑을 빼고 허락 없이 만들어진, 우리를 둘러싼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