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너를 지켜줄게
내게는 공황장애가 있지만, 공황장애 속에 광장 공포증이라는 증상을 또 가지고 있었다. 심오한 정신세계만큼 심오한 정신 질환이었다. 처음으로 이 증상을 알게 된 것은, 식사를 하기 위해 한 쇼핑몰의 지하로 내려갔는데 오픈하지 않은 가게들이 가득해 깜깜했다. 그곳으로 발을 한 걸음 내딛는데 심장과 함께 다리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원인은 몰라도 공포감이 엄습해 엉엉 울며 지상으로 올라갔다.
남들은 큰 집에 사는 꿈을 꿀 때 작은 집에 살고 싶어 했는데, 욕심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것도 진단을 받고 나서였다. 한눈에 집안이 다 보여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었다.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었던 것이었다. 귀신같은 미스터리 한 것 말고, 국내 영화 숨바꼭질에서처럼 누군가 나의 집에 들어와서 살고 있는데 모를 수도 있다는 공포심이었다. 아주 많은 공포영화를 보았고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지만, 내게 가장 무서운 영화는 여전히 <숨바꼭질>로 남아 있는 건 그러한 맥락일 것이다.
광장 공포증은 해외여행을 떠나 있을 때도 느껴졌다. 어느 나라에 가면 꼭 가봐야 하는 광장, 공원, 이런 곳에만 가면 누구도 나를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타자가 된 기분을 느꼈었다. 두리번거리며 계속 선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댔다. 그에 비해 친구는 차분하게 여행을 즐겼다. 친구의 그런 의연함이 다수의 외국인들 사이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나를 잡아주었다.
내게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있으면 괜찮았다. 가족이든, 친구든, 선해 보이는 사람이든. 그런데 내가 괜찮지 않은 때는 장년의 아저씨가 내 곁을 지나갈 때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신경이 곤두서서 같은 방향으로 길을 걷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마주 보고 걸을 일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이 지나가도록 멈춰 서 있었다. 상담을 받지 않아도 대충 이유는 알 것 같았다.
6살에 엘리베이터에서 동네 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이 첫 번째 기억이었다. 어린 나이에 뭘 모르는 것 같았지만, 다 알았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어려웠으며 내가 잘못한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내가 그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 시간에 집에 있었더라면 그 일을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기억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불쾌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우울한 날이면 그 기억부터 올라왔다. 마치 내 불행의 시작은 그날이었던 것처럼 불행의 얼굴이 된 기억이었다.
그리곤 또 그런 일이 인생에서 두세 번은 더 있었는 것 같다. 중학생 때 봉사활동을 하다가, 대학생 때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아주 평온한 순간이면 그런 사고가 벌어졌다. 내가 신고하면 사건이 되었을 텐데,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걸 내게 일어난 사고로 남겨두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자, 나는 나의 불편을 항의할 수 없는 어른으로 자랐다. 분노할 수 없는 사람, 내게 세상은 무서운 곳이었다.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언제 또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몰랐기에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지냈다.
교수님께선 트라우마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진 않는다고 하셨다. 그 이후의 대처로 인해 트라우마를 남느냐를 결정짓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영혼은 그런 일로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교수님은 내 영혼을 위로해 주셨다. 하물며 그 사람의 자식까지 저주하고 욕한 것을 고해하고 6살에서 아직 자라지 못한 나의 자아를 이해해주셨다. 나도 6살의 나를 보게 되었다. 그러자 내가 나를 지켜줄 수 없기에 세상을 무서워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괜찮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로 나를 달래는 건 부족했다.
이미 두려움을 체험하고 벌벌 떠는 내게는 그런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신용품을 들고 다니며 선량한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교수님께서는 선량한 남자에게 그 호신용품을 쓰는 게 아니고, 몇몇의 위험이 되는 사람에게 대비하기 위해 챙기는 것이라 의미가 다르다고 하셨다. 두려움에 떠는 내게 갖은 이상을 집어넣으며 이 세상에 이상한 사람은 없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내게 필요한 것은 딱 한마디, '괜찮아, 어떤 일이 일어나도 너를 지켜줄게.'였다.
매체에서는 성범죄를 두고 흔히 씻기지 않는 상처 같은 표현을 하곤 한다. 여러 번 이런 일을 겪은 피해자로서 그 같은 표현에 기분이 나쁘다. 제대로 된 벌이 이루어졌더라면 나보단 그 사람에게 씻기지 않을 기억과 인생이 될 텐데.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무엇이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부족했다. 그 사람이 그러고도 한참을 잘 살고, 그 사람의 어머니가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어느샌가 장가를 갔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그 새끼는 잘 사는 듯했다. 어린 나는 그 새끼와 그 새끼가 낳을 자식까지 불행하길 빌곤 했다. 그 사람의 자식에겐 죄가 없음을 알지만 내 분노는 나와 같이 여리고 어린것에게 향했다. 왜, 내가 대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무겁긴 하지만, 삼단봉을 들고 다닌다.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고,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늘 들고 다닐 수 있는 호신용품이 좋겠다는 교수님의 조언이 있었다. 그 얘길 친구에게 했다. 나의 치료와 나의 삶을 되찾길 응원해주는 멋진 친구가 얼마 후 삼단봉을 선물해 왔다. 경찰이 쓰는 것과 가장 비슷한 것을 골라봤다고 했다. 챙겨 다니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되어서 존재감이 아주 잘 느껴진다. 이걸 자유자재로 쓸 만큼 내가 믿음직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장 어린 오늘의 나를 지키고, 또 다가오는 시간 속에 나를 잘 키우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