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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Oct 30. 2022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기

찾았다, 내 첫 취미!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리고 매일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이 심심해 보여서 그립톡을 사기로 한 건 지난 해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초록색 목도리를 한 곰인형 디자인이 눈에 들어왔다. 곰인형은 두 가지 색상이어서 고민을 하다 친구에게 골라달라고 사진을 보냈다. 그러자 친구는 베이지색 곰을 고르고는, 커플 템을 하자며 자신의 것도 주문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수제로 만든다는 곰돌이 그립톡은 2주 이상 걸려서 집으로 배송되었다. 그런데 곰돌이 그립톡의 크기가 심상찮았다. 스마트폰 뒤편에 붙이고 나니 카메라가 가려졌다. 곰을 옆으로 돌리거나, 찌그러뜨려야 카메라를 겨우 쓸 수 있었다. 친구는 우리가 산 게 그립톡이 맞냐고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의 폰은 바 형식의 일반 스마트폰이 아니라 반으로 접히는 플립형 스마트폰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곰인형은 거대하게 우뚝 솟아 친구의 폰을 지고 다녔다.


친구는 나에 대한 사랑과 의리로 그 곰을 계속 붙이고 다녀주었다. 그러다 결국 다리 한쪽과 팔 한쪽이 떨어지고 나서야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곰을 떼냈다. 곰에게는 너무 작은 플립, 휴대폰보다 큰 곰이 친구의 폰을 열심히 지킨 듯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지키고 싶었다고 말하는 친구, 그만 지켜도 될 것 같은 곰돌이의 상태를 보며 친구의 사랑을 또 느꼈다.


그에 반해 애지중지 들고 다닌 덕에 내 곰돌이는 무사했다. 정신과 약을 복용하기 전, 지하철을 타면 자꾸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득했다. 그래서 보통은 책을 읽으면서 가거나, 애써 그 감정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노래를 들으며 상담 장소까지 향했다. 그러다 휴대폰을 뒤집어보니, 목도리가 풀려있는 곰인형이 보였다. 목도리도 제대로 고쳐 묶어주고, 팔다리도 제자리에 정렬해 주었다. 털도 손으로 대강 빗어주고 나면 뿌듯함이 밀려왔다. 단정해진 곰인형의 모습, 안정감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면 대강 교수님이 계신 대학교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봄이 왔다. 곰돌이 그립톡이 무거워 손목에 무리가 갈 때쯤, 나는 곰인형을 버리지 못해 그립톡의 접착 부위만 떼어냈다. 곰인형의 등 털이 모조리 뜯겨나갔다. 꿰매서 수선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간의 정 때문인지 버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립톡의 기능은 없지만 책상 앞에 전시를 해두었다. 그러자 대학교 졸업 기념으로 다녀온 해외여행, 선선한 날씨의 네덜란드에서 사 온 미피 인형이 생각났다. 그 미피 인형을 구석에서 꺼내 곰과 함께 두었다. 미피를 따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자꾸 뒤이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로고, 어디선가 사모은 엽서, 친오빠와 찍은 어릴 적 사진, 아주 예전에 받은 작가 명함. 눈앞에 두고 싶은 게 많았다.


공부를 포기한 이후로 몇 년이 흘렀는데, 역할을 다한 곰인형 그립톡을 버리기 싫어서 책상 정리를 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또 발견했다. 보들보들한 인형이었다. 특히 오래되어 사람들에게 잊혀가는, 그러나 한때는 많은 사랑을 받았을 빈티지 인형이 좋았다. 다시 내 손에 들어오면 과거형의 사랑이 아니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어 좋았다. 빈티지 인형만의 독특한 생김새도 좋았고, 세월의 흔적으로 낡고 해진 곳이 있어도 좋았다. 그래서 빈티지 인형을 두고 나는 살아남은 인형이라고 부른다.


책상 이곳저곳에 살아남은 인형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비치했다. 그러자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즐거워졌다. 내 책상으로 새로 오게 된 인형을 정성스레 손으로 세탁하고, 포근한 햇빛에 말려서 빗질을 했다. 가끔은 미용도 해줬다. 미용이란 단어가 무색하지만 털을 다듬어줬다. 수십 개의 인형 친구들을 들이며 나는 아주 바쁘고 행복하게 지냈다.


이 이야길 들은 교수님께서는 정신적 에너지에도 여유가 생긴 것이라고 하셨다. 우울에 취해 그것만 처리하기에도 바쁜 나의 일상에 틈이 생긴 것이다. 상념이 조금 걷혀간 것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데만 썼던 외로운 책상이 내가 좋아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흐른 지금, 나는 자신 있게 인형에 미친 사람이 되어있다. 메고 다니는 가방에만 곰인형이 두 개, 책상 가득 인형이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선물로 주고 있다.


좋아하는 것에 돈을 쓰고, 시간을 쓰고, 좋아하는 것을 보내주고 새로 또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아끼던 텀블러를 잃어버리고 엉엉 울면서 집에 돌아가던 고시촌 생활이 기억나는 무렵이다. 보내고 또 들이고, 더 오래 사랑을 이어갈 방법을 배워간다. 매일 다른 인형을 출근메이트로 데려가며 공식적인 키덜트가 되었다. 오히려 좋아, 모두가 함께 인형을 귀여워 해준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매일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느라 바쁜 나의 친구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생긴 것을 기뻐했다. 그리고 내가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쓰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자, 행복한 삶의 선배로서 멋진 말을 해주었다. 오늘 이것들을 좋아하는 감정이 영원하진 않으니, 이 감정을 누릴 수 있을 때 누려야 한다고. 너무 즐긴 나머지 내 방은 인형으로 가득 차 버렸다. 아무래도 나에게 행복은 인형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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