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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Oct 24. 2022

행복을 좇으면 승패가 없는 인생

나로서 살아야 한다

내 곁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누굴까. 그건 '나'.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내게 박하게 구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나'는 나와 늘 함께 하고, 혐오의 눈으로 나를 훑고서 내뱉은 모든 말을 거르지 못하고 듣게 된다. 죄 없는 나는 타박 당하고 점점 더 작아지기 일쑤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나를 자학할수록 더 빛나고,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 되어 때때로 멋진 사람이 된다. 열심히 산다, 열심히 했다는 말이 청소년기에 접한 자기계발서에서 익힌 대표적인 성공의 증거였다. 나도 열심히 해내서 남들처럼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채찍질을 하면서 살아가면 달린 만큼 지치고, 맞은 만큼 아픔이 남다.


매번 나를 탓했다. 이 정도는 해야 대외적인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하물며 남들에게 엄마 친구 딸, 아빠 친구 딸,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더 어려웠다. 나는 이미 부모님의 딸이었음에도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많았다. 적어도 괜찮은 학교를 나왔으니 제 몫은 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은근한 기대감과, 때가 되면 잘 될 거라는 말도 위안 삼을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솔직히 이렇다할 멋진 꿈은 없었기에 때가 되면 잘 될 거란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도 괜찮은데 나중에 잘 될 거라는 말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의 말 속에서 내게 갖는 기대감을 눈치채버렸다.

 
래서 나를 망치러 온 나로서 살아왔다. 왜 해내지 못하는지, 왜 때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아직도 시험에서는 낙방만 하는 건지. 괴로움이 깊어지면 나는 생각 속에 나를 묻었다. 깊은 곳으로 나를 끌고 들어갈 때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 무엇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행여 내가 나를 편하게 두면, 그리고 나를 위로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대로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더 다그쳐야 했다. 죽을 각오까지 하게 만들었다. 


죽음이란 자기자신을 궁지로 몬 사람에게 지배적인 위계를 갖게 된다. 이게 안되면 죽으면 된다는 생각은 얼핏 비장한 각오처럼 비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인생에 주어지는 사소한 모든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럴 때마다 실패하는 내가 삶을 져버리도록 만들었다. 세상에 단 한 명도 내 편이 없도록, '나'마저 적으로 두는 건 살기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도망갈 곳 없이 항상 나를 감시했다.


나는 독일어를 유독 좋아했다. 공부를 하면서도 내내 즐거웠는데, 어학 성적과 흥미는 조금 달랐다. 6개월 만에 준고급 수준의 실력를 갖기란 어려웠다. 시험이 다가올 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잠을 제대로 잘 자격이 없다 판단했고, 자면서도 들을 수 있도록 독일어 방송을 틀어두고 잤다. 독일어 성적을 받아야만 시험에 응시할 수 있어서 선잠 속 배경음악같던 독일어는 지옥같았다. 그리고 나는 보란듯이 몇 점의 차이로 독일어 성적 기준을 달성하지 못했다. 나는 좋아하는 것도 못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그런 짙은 자기혐오 속에서도 나를 숨 쉬게 하는 단 하나의 존재는 글을 남기는 것이었다. 남기지 않으면 찬란한 기억은 금세 사라진다. 존재로서의 나는 사라지고, 상처 입은 나도 사라지고, 세상의 잣대 속에서 무엇이든 잘 못해낸 기억만 남는다. 그렇게 삶은 낱장이 되어 날아간다.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닌 주인공의 단편 이야기가 남는다. 누구도 승자와 패자라고 말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 패배자가 되고야 마는 것이다. 패배자로 끝난 나의 실수 단편선은 사회 속에 있는 나를 감추고 또 숨게 만든다.


행복이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 힘들어하는 나를 타박하는 것보다도 쉽다. 그 물음엔  단숨에 답이 그려진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용기를 내기만 하면 된다.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과 이 시간 속에는 쉬지 않고 노력한 내가 있다. 분명 있었는데, 세상의 이야길 듣고 있다 보면 그 속으로 내가 사라진다. 눈앞에 행복을 두고도 행복이 멀고 또 어려워 아득해지는 건 한순간이다. '역시 네가 못해서 그래.' 허상일지언정 그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한 나를 미워해선 안된다. 이 이야기의 끝까지, 주인공은 나 하나뿐이면서 둘이기도 하다. 나는 '나'와 잘 지내야만 한다.


그런데도 자기혐오는 의외의 앞머리를 달고 나타난다. '역시'다. 역시 내가 하는 일이 그렇지, 같은 말은 애써온 노력들을 뜻 없이 깜빡이는 눈처럼 만든다. 보였다가 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암전이 반복되어도 계속해서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깜빡임이 신경쓰이기 시작하면, 그만 무얼 보고 있는 질 잊는다. 내게 행복이 그랬다. 행복, 역시 혐오, 혐오, 혐오.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 커피 한 잔과 함께 다리엔 자고 있는 고양이가 있는 삶이면 좋을 것 같았다. 널리 알려지는 일, 누군가를 구하고 돕는 팔자에도 없는 영웅 서사는 남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 비슷한 것을 하고 싶었다. 비록 내 행복이 아닐지라도. 어쩌면 그런 꿈을 가지라고 말한 사회와 그것에 동의한 또 다른 내가 있었기에 한참을 쫓은 허상이었다.

나를 망치러 온 나에게 고해야 한다. 겨우 먹고 살 때, 사는 게 힘들어서 곡기를 끊었다. 이제는 맛있는 걸 먹다가도 이따금씩 밀려오는 허무함에 살기 싫단 생각을 했다. 살고 싶어 글을 쓸 때, 너는 죽고 싶다 빌었고 느닷없이 행복과 멀어졌다 느낄 때 너는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행복을 구하고 싶어 했다니. 나는 나를 망치는 방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나하나 애정 가득했던 인형들을 팽개치고, 약을 마음대로 줄이고. 남아 있는 것들을, 남아있는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세간 사람들의 눈에 맞춰 살려하니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꽤 오래 살지 않았는가.

그런 허물들을 다 벗어내려고 나는 다시 글을 쓴다. 또다시 돌아올 너를 알지만, 나는 그때마다 앉아 글을 쓸 것이다. 나는 나를 망치기에 능하지만, 나는 나를 살리는 방법도 알고 있다. 나는 밀려오는 허무에 휩쓸려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엉망인 글도 써 내려갈 것이고, 엉망인 나를 내보이기 위해 허물도 벗겨낼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내 글엔 마침표 없이 이어지도록, 자학하던 나를 페이지 끝자락에 걸쳐서 쓰인 문장으로 남긴다. 페이지가 넘어가면 잊혀지겠지만 돌아오면 다독일 흔적으로 둔다. 나는 나로서 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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