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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Oct 17. 2022

탈고

제를 올리며

향이 타들어가는 것을 보며 잔뜩 차려놓은 제사상 앞에서 절을 올렸다. 아빠는 오빠와 내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이 기뻐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같은 절을 하면서도 셋의 생각은 아마도 다 달랐을 텐데, 나는 또 시답잖은 이야기나 했다. 생전 할머니는 혼자 방에 앉아서 자주 TV를 보셨다. 가끔 내가 할머니 방에 놀러 가면, 할머니는 점을 쳐보고 있다며 화투를 줄 세워놓거나 몸을 양쪽으로 까딱거리며 6시 내 고향을 보곤 하셨다.

하루는 북녘에 취재를 다녀온 어떤 TV프로를 보여드리며 말을 걸었는데, 할머니는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셨다. 밥을 드실 땐 자주 북녘에서의 삶을 얘기하셨는데도 말이다. 어떤 대게가 맛있었고, 어떤 일을 했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꼭 밥상머리에서 툭 내던져졌다.

그맘때의 할머니는 몸이 안 좋으셨다. 이리저리 번갈아가며 누워계셨고, 특별히 반응을 보이는 것이 없어서 나는 더 TV 속 북녘을 보여 드리면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나와는 다른 시간, 18살의 나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의 뒷 페이지를 펼쳐본 할머니는 더 이상 욕심내는 것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내게 아주 작은 동전지갑 하나를 남기셨다. 아끼고 아낀 용돈 3,000원과 함께.

믿기지 않던 할머니의 죽음은 고등학교 정문을 나오는 나의 눈앞을 모두 가렸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전화로 전해 들은 비보에 나는 2년을 오고 간 학교 정문을 찾지 못했다.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던 선생님께서 내 손을 잡고 정문까지 데려다주셨다. 잘 보내드리고 오라고 배웅도 해주셨다. 죽음, 배웅, 인사, 안녕, 그 어떤 말도 형체가 없었다. 찢어지게 아픈 내 마음도 형체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눈물로 채워보려고 집에 가는 동안 울었다. 교복을 벗어두고, 까만 옷과 까만 양말을 찾는데 내겐 그런 옷이 없었다.

준비되지 않은 작별, 그건 남겨진 이에게도 떠나는 이에게도 같은 몫이 주어진다. 그래도 남겨진 이들은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보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증명사진 같기도 한데, 이 증명에는 다른 이름이 붙는다. 영정. 평안하고 고요하다는 뜻도, 제사나 장례에 쓰는 위패라는 뜻도 있는데 하여간 그 고요한 것에는 깊은 무언가 있지만 알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끝을 위한 끝이 있어야 했다. 빈소를 꼬박 다 채워서 지키고 화장터로 떠났다. 내내 조용했던 고모는 뜨거운 불에 들어간 할머니의 관을 보며 소리를 쳤다. '엄마, 뜨거운데 빨리 나와!'
고모의 사무치는 소리에 영원한 안녕이 깃든 것 같이 슬펐다. 뜨거운 곳에서 빠져나온 할머니는 어디로 향했을까. 집, 경로당, 시장, 둘러봐도 다신 보이지 않겠지만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맞았을 것이다.

장례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온 첫 날밤, 할머니는 내 꿈에 나와 좋은 말을 해주셨다. 일상적이지만 따뜻한 그런 말. 그래서 할머니의 제사상 앞에 절을 올리며 나는 또 잘 지내셨냔 인사나 건넸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내 이야긴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묻고 또 써내려 가야 했다.

그런데도 교육원의 하이라이트인 단막 대본을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남의 이야길 듣고 비슷하게 써 내려가는 것은 고작 영감 정도에 부족하다. 그렇다고 남의 이야길 쓰듯 써 내려가자니 글이 산으로 향해 갔다. 나는 바다에 살고 있는데 길 잃은 글을 학우들 앞에서 펼쳐 보일 순 없었다. 나는 우리 반의 백수 대표 아니었던가. 좀 더 멋진 글을 쓰고 싶었다.

나의 욕심과 달리 대본은 어떤 식으로 마음을 먹어봐도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텅 빈 백지장, 떠올릴수록 갑갑했다. 등장인물과 성격, 스토리, 시퀀스, 모든 것이 나왔는데 왜 써지지 않는지 이해가 안 됐다. 교수님께선 내게 등장인물에도 나의 자아를 심어놓아서 그렇다고 하셨다. 모든 씬을 내가 이끌어 나가려고 생각하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내가 만든 등장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게 하면 된다는데,  난 내가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의 마지막 씬, 마지막 대사는 무엇이 되든 꼭 있다. 그러니 그 인물의 마지막 대사를 지어주라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B의 이야길 들으며 써내려 갔다. 더불어 나의 이야기도 착실히 이어져 가고 있다. 내가 주인공인 이번 삶에서 내 마지막 대사가 사뭇 궁금하다. 순리대로 언젠가 끝은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내 첫 번째 대본은 졸작이 되었다. 학우들이 유하게 말해준 덕분에 이것저것 빠진 것이 많다는 이야길 들었다. 더러는 언어에서 다정함과 섬세함이 느껴졌다는 식의 칭찬도 들었다. 이걸 조합하면 기둥 없는 집에 살림살이가 들어앉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교육원의 선생님께서는 이러한 학우들의 평가를 단출하게 정리해주셨다. 대본을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기본적인 틀이 없다, 그러나 남들이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얼떨떨한 칭찬 앞에 대본 속에 넣어둔 나의 자아가 쑥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본을 읽는 것에 게을리 임했던 것도 맞았다. 내 삶을 돌보지 않는 내가 어떻게 남의 삶을 엿보겠는가. 더불어 나는 나의 세상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자 나의 세상을 망치기 위해 오랜 노력을 해온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선생님께서 높이 산 나의 재능은 B급 유머에 있었다. 어설프게 쓴 글이 B급이 아니라, 공들여 쓴 A급에서 선로를 우회할 만큼의 고민이 있어야 완성할 수 있는 것이 B급이었다. 그 어떤 학우도 도전하지 않았던 장르였다. 그럼에도 써보고 싶었던 이유는 내 삶이 A급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누구도 궁금하지 않았을 이야기,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시시한 일상 속에서 건져낼 만한 소재가 없었다. 그렇게 변변찮은 내 이야길 꺼내자, 나는 내가 그리던 사람이 되어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보통 사람의 삶을 쓰는 작가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한 편의 대본을 완성했다. 나의 첫 대본 속 주인공 B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끝이 없는 이야기는 없다. 어떻게든 끝나게 될 이야기. 향이 타오르고 그 자리엔 연기가 남아 허공으로 흩어졌다. 향은 불꽃처럼 피어 하강하다가 재가 되어 흐드러졌다. 연기로 또다시 상승하며 미지의 마지막을 향한다. 나도 그렇게 천천히 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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