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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Oct 10. 2022

자신 있으면

길을 나서봐요

Vocatus atque non vocatus, deus aderit  보이든 보이지 않든 신은 존재한다.

칼 융의 현관문에 적힌 말이라고 한다. 정신 분석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사람, 어쩌면 누구보다도 인간에 대해서 잘 알았을 것 같은 사람이 자신을 찾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신에 대한 것이라니, 죽음과 신은 뗄 수 없는 것인가 싶은 대목이었다. 신은 대체 무엇인가 싶어졌다. 새로울 신으로 쓴다면 죽음 뒤 새로움, 몸 신을 쓴 다면 죽음이 머무른 것은 몸,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20대 후반에 한참을 곱씹고 다닌 말이었다.


나는 죽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다. 8살쯤, 엄마가 나를 두고 죽으면 어떡하나 너무 무서운 밤이 있었다. 엄마가 그 어떤 징후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어린아이의 난데없는 불안치고는 꽤나 묵직했다. 일기장에 고민을 적어서 제출했다. 선생님은 정윤이에게 사춘기가 왔나 봐, 어머니는 언제가 정윤이의 곁에 있을 거야 라는 답을 해주셨다. 그 말을 순진하고 온전하게 다 믿은 나는 위안 삼았다. 그리고 그 위기를 잘 넘겼다.


영어 공부를 제일 좋아하던 중,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연히 알게 된 말이 있었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그 말을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노트 구석에 써두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알 수 없는 것이 수험 생활에 도움을 주었다. 결국은 다 죽게 될 테니 해볼 만큼만 해보자는 의미가 되었다. 허무주의는 아니었다.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다 같은 결말이라고 하면 그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었다. 새벽 3시, 4시가 되도록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공부했다.


죽음을 기억하며 살던 고등학생은, 대학생이 되면서 되려 무엇도 떠올리지 못했다. 사랑을 많이 받았고, 노력이 결과로 보이던 청소년기와는 달랐다. 차라리 죽음 앞에 모든 삶이 평등하단 걸 떠올렸다면 덜 고통스러웠을 텐데.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시간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상하게 몸뚱이가 물 먹은 솜 같았지만, 모두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닐까 하고 희끗한 희망 같은 걸 품고 살긴 했다. 덜덜 떨면서 매일을 살고, 그 마음이 나를 짓눌러 1년 중 300일도 넘게 피 흘리는 사람으로 살게 했지만.


피를 매일 보는 사람은 자주 불안 속에 빠진다. 있지 말아야 할 곳에서 보이는 피, 침묵 속에서 대단한 공포감을 보내온다. 한국인들이 습관처럼 내뱉는 말, '~해서 죽고 싶다.'는 말을 장난스레 뱉을 수 없게 되었다. 고통, 무감각, 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죽음의 탈을 썼었다. 무력감에 찌든 내게 죽음은 너무 쉬운 답이자 친근한 답이었다. 0번의 보기로 내게 남아있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죽어 버릴 것이었다. 죽어서 내 삶을 버리는 것이든, 죽음을 저질러버리는 것이든 나는 죽음을 택해'버릴 것'이었다. 해보고, 안되면 죽자. 해보고 또 안되면 죽자. 다음 겨울이 오기 전에 죽자. 30살이 되면 죽자. 내일은 더 열심히 살자는 생명력 있는 다짐이 아니었다. 내일은 더 열심히 죽음으로 향해가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더라니, 잠을 못 자기 시작했다. 잠을 자면서는 꿈을 꿨고, 꿈을 깨면 현실의 꿈이 바래져 있어 멀끔한 하루를 맞았다. 간밤의 꿈이 새로운 하루를 다 뒤덮어 영향을 줄 만큼 내 하루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꿈속의 일을 인터넷에 찾아보는 게 일상이었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했다. 침대에 누워있는 내게 그 일이 찾아올 것이라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하루는 더디게 지나갔다. 아무 변화 없는 날들이었다. 내게만 너무 무거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퍼뜨렸다. 예외 없이 나도 백신을 맞으러 갔다. 예방접종으로 잠시 시야가 흐려지고 휘청거리다 눈을 떴을 때, 진짜 죽음이 나를 스쳤다. 나는 온몸의 신경이 살아났다. 겨우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모든 것에 과민하고 진짜로 죽어서 모든 것이 버려질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프지만 않게 해 주시면, 공부는 내가 열심히 해보겠다고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하나밖에 없는 저의 꿈은 내가 성취해야 할 몫이니 기대지 않겠다, 그러니 멈추지 않는 하혈을 멎게 해 달라 기도할 때는 들어주시는 분이 없었다. 모르는 절에 들어간 탓인지 울면서 108번 머리를 조아려도 우산 없는 나에게 비를 내려주셨다. 20대의 나에겐 자비로운 신이란 없었다. 그로부터 한참을 더 피 흘리며 살았으니, 못 들으셨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부터 나의 신념은 신은 없다는 것이었다. 내 마음이 편해지길 바라며 무릎과 이마가 닳도록 기도한 엄마의 정성이 아까울 만큼 나는 냉소적으로 굴었다. 나의 일에 가장 필사적이었던 내 바람을 무시한 존재가 타인의 기도로 나를 편하게 해 준다면 억울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생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고, 망가질 대로 망가지도록 두었다. 고통받는 피조물을 좋아하는 건가 싶어 내 고통이 보람찼다. 낮에는 코웃음이 나왔고 밤이 되면 기댈 곳 하나 없어 처절하게 울어댔다.


울면서 쓴 일기에도 나는 내게 모질게 굴었지만, 그곳에서도 내가 믿을 구석은 나밖에 없었다. 아주 겨자씨만 한 나라도 그게 있어 나는 글을 쓸 수 있었다. 내 마음의 깊은 바닥을 짚으며, 종이 위에 올려두고 보듬어 보며, 내가 건넨 일말의 위로를 잊지 않기 위해 연필의 흑심을 분질르며, 일종의 의식이었다. 죽어있는 내가 유일하게 감각을 살리는 시간,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날, 글을 쓰는 나는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조막만 한 나를 겨우 건져냈다.


은 없는데, 나에겐 나 자신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내가 찾던 그 신이 사실은 자신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나를 바로 믿으니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나를 자신 있게 세워 보일 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못하는 것 앞에서도 자유로워졌다. 포기하는 것도, 계속하는 것도 자신만 있으면 어디로든 향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줌 겨우 남은 내 자신으로 이곳저곳을 헤맸다. 내가 싫다고 하는 건 좀 더 귀담아듣게 되었고, 내가 하고 싶다고 하는 건 용기를 내 해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출근을 앞두었던 회사에 입사 거절 통보를 했다.


교수님께선 내가 나를 살리고 있다고 했다. 원치 않는 회사에 울면서 겨자 먹기 식으로 가지 않은 것과 떨어진 꽃의 마지막을 기억하기 위해 기어코 쪼그려 앉은 나, 세상이 칠흑 같아 그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던 내가 자꾸 무언갈 해보려 하고 있었다. 어떤 신학자와 철학자는 악을 두고 nothing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내 속에 아무것도 없던 공허한 시간을 지나, 사랑하는 것 loving을 위한 시간을 보낸다.


교수님께선 신은 자신 안에 있다고 하셨다. 그래서 신이 없다 믿던 내게는 스스로 만든 지옥뿐이었다. 그곳이 무저갱,  그 속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 내가 우는 건 당연했다. 작은 것에서 사랑을 느끼는 나를 찾으니, 모든 곳이 낙원이다. 내가 행복하니 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환하게 빛나 행복을 보탠다.


교수님께선 종교가 없는 내게 이따금씩 성경의 한 구절을 들려주신다.

"I am who I am." 신이 그의 존재를 나타낼 때 했다는 말,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나는 곧 나다.'라는 뜻이다. 나를 굳게 믿을 때, 나 자신을 알아볼 때, 그분도 내 곁에 있음을 느낀다. 나는 나, 있는 그대로의 나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희미했던 어둠 속에서 끝끝내 잃어버리지 않고 사랑하는 나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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