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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두비 Oct 17. 2022

삶은 구차하다

그래서 더 가까이서 사랑해야 한다고

날아다니는 병균 캐리어, 날지 못하는 닭둘기는 비둘기의 도시 속 이름이다. 혐오가 담겨있다. 그런데 누구도 혐오에 대해 자신 있게 표현해선 안된다는 걸 인간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생명에게는 조금 더 박하다. 그저 동물이고 스쳐가는 짧은 인연이라도 험한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 혐오의 이름 입에 담게 된다는 건 우리와 생활 반경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혐오를 아무렇지 않게 일삼지만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마치 그들이 없는 것처럼 대하고, 욕하고, 감추는 것이 이 도시의 역설이다.

나는 그런 취급을 받는 비둘기가 안타깝다. 머리 위를 날아 지나가면 병균이 떨어질 것 같다며 머리를 감싼다. 그리고 염분 가득한 인간의 음식을 먹고 감각이 퇴화된 비둘기가 겨우 차를 피하는 걸 보면, 살쪄서 피하지도 못한다고 비웃는다. 인간이 흘린 부스러기 같은 것을 먹고 팍팍한 도시에서 겨우 살아가는 비둘기에게 인간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먹이 한 번, 깨끗한 물 한 번 대접해주지 않으면서도 더 내어주지 않기 위해 속 좁게 구는 것이 이곳 세상이다. 겨우 물이 고인 곳을 찾아 날개를 씻고 앉아있으면, 더러운 게 더러운 곳에 앉아있다는 반응들이다.

비둘기는 그저 살아가고 있다. 살아간다는 건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것이다. 먹을 것을 사기 위해 하루 종일 직장에 앉아있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웃으면서 대하는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죽는 건 다 쉽다. 고통은 짧고 그 후의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 죽어버리면 그뿐이다. 죽음은 물릴 수도 없어서 저지르고 나면 아쉬움도 반성도 없다. 그래서 죽음 그 자체는 아름다운 구석이라곤 없다. 하지만 삶은 처절함이 있어 경이로운 것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지는 몫, 목숨을 끊임없이 쉬어가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나는 벌레를 좋아했다.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잔디밭이 있었다. 잔디가 있는 덕분에 많은 생명체가 있었다. 지렁이도 있고, 쥐며느리도 있고, 사마귀, 달팽이, 개미, 나비, 없는 게 없었다. 특히 놀이기구도 여럿 설치되어 있었지만 나는 틈만 나면 잔디밭에 쪼그리고 앉아 움직이는 생명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가끔은 그것들이 너무 좋아 작은 손에 고이 올려서는 유치원 담임선생님께 드렸다. 내가 귀여워하는 것을 보여드렸는데, 선생님은 놀란 눈치를 보였다. 그 이후로는 잔디 속 생명들과 함께 놀진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줄넘기 시험을 준비하던 때였다. 화단에서 굴러 떨어진 애벌레를 보고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애벌레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안쓰러워 손으로 살짝 잡아 풀잎 사이에 놓아줬다. 차갑고 보들한 애벌레, 징그럽다는 표현 속에 가려진 애벌레의 여린 그 촉감을 아직 잊지 못했다. 걔가 자라서 사람들 눈의 어떤 흉측한 것이 되었을진 모르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싫다고 하니 나도 싫어하는 척 외면했다. 온전한 나를 찾으니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 말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이 무서워서 하지 못했던 말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벌레'도 내가 좋아하는 생명 중 하나이며, '혐오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이 말하지 못해 참아온 이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너무 많아서 대중교통도 못 타고, 길 가다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것도 못했었다. 모두가 움직일 때 나만 서 있으면 눈에 띌까 봐 그랬다. 모두가 싫어한다고 말할 때 나만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릴 적 유치원 선생님의 표정을 또 보게 될 것 같아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벌레를 무서워하는 사람의 마음도 알겠고, 이를 아끼는 내 마음도 알고 있다.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된 나는 내가 좋아하는 벌레를 또다시 누군가에게 보여주진 않게 되었다. 이건 반쪽짜리 사랑이 아니라 풀밭에 있어야 할 벌레의 보금자리를 아끼고, 그 벌레를 무서워할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완전한 사랑을 찾아간다.


사랑을 말하지 못하는 것보다 슬픈 삶은 없다. 사랑을 잃은 삶만큼 죽음에 가까운 것은 없다. 사랑은 자꾸 드러내야 삶을 채울 수 있다. 삶이란 내 주변의 것들에게 구차하고 구질하게 굴어 자꾸만 주변을 맴도는 것이다. 이걸 못해서, 이걸 외면해서 그렇게도 오래 죽음 곁을 서성였다. 대충 살고 대충 보고, 대충 지나가고 대충 시간만 흘려보내면 삶은 그저 죽어가는 시간이 된다. 미워 보이는 것들로 채운다. 그 대상에서 나 자신이 예외일 수 없을 만큼 죽어가는 시간은 많은 걸 삼킨다. 삶과 죽음, 그 대척점 사이에는 가까이서 살핀 빼곡한 사랑만이 채워져야 한다.


멀리서 보면 편안히 누워있는 지평선이, 실은 다가가면 바람에 물결치고 있는 풀밭이 된다. 가까이에서 보면 더듬이 달린 괴상한 생명체가 멀리서 보면 지구를 살리고 있다. 남들과 똑같게 구는 것이 나를 살리는 줄로 알았는데, 나는 나답게 살아야만 이 삶이 더 팍팍해지지 않는다. 휩쓸리지 않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주저앉아 더 가까이서 보면 사랑할 것은 차고 넘친다. 한 차례 큰 우울이 지나간 뒤 진실만이 남은 내 마음이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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