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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Feb 01. 2024

똥도 글도 매일 싸야 편안하고 건강하다

글쓰기의 치유 능력

여행을 가거나 남의 집에 머물면 종종 변비에 걸렸다. 변비에 좋다는 바나나나 고구마를 한 아름 쑤셔 넣어도, 배만 불러올 뿐 배설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더부룩한 배와 누렇게 떠버린 얼굴. 그렇다고 끼니를 거를 수도 없고 답답하고 난처했다. 이러다 평생 한 곳에만 머물러야 하는 거 아니야. 변비 때문에 그토록 좋아하는 여행마저 두려워졌다.



변비의 고통은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구나 잘 안다. 매일 잘 싸야 편안하고 건강하다. 입으로 먹은 것은 뱃속에 계속 머물면 안 된다. 반드시 배설물로 나와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머리와 가슴이 만들어낸 모든 것도 안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밖으로 나와줘야 한다.



일기든 수필이든 형식을 가리지 않고 자투리 시간에 끼적이는 걸 좋아했다.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고 자유롭게 썼다. 그러다 한동안 글이란 걸 쓰지 않고 살았다. 여유가 없다거나, 흥미를 잃었다거나, 그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야 등 변명거리는 넘치고 흘렀다. 수많은 변명이 있었지만, 진짜 원인은 아니었다.




첫사랑과 만나서 결혼하는 커플은 얼마나 될까.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처럼 결혼 전 몇 번의 연애가 있었다.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 눈꺼풀에 씐 콩깍지가 벗겨지면 헤어졌다. 헤어진 모든 연인이 신사적이고 품위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글을 쓰지 않음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었다.


나쁜 년, 어디 잘 사나 두고 보자. 내 모든 걸 걸고 네 인생 망쳐줄 테니까!
너 같은 여자를 누가 견뎌? 세상 어떤 남자도 견딜 수 없을 걸.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면, 내가 망가뜨려 줘야지, 아무도 가질 수 없게.



저주나 협박을 받으면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칼이 되어 가슴을 저몄고, 송곳이 되어 가슴 깊이 박혔다. 스토킹을 당할 때는 경찰에 신고를 했어도 큰 도움을 받지 못해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래, 난 나쁘고 이상한 인간인 가봐.'
'나 같은 건 살 가치가 없어.'
'내 인생 따위 누구 도움 없이도 스스로 망가뜨릴 수 있어.'



누군가의 공격보다 나를 상처 입힌 건 자학이었다. 스스로를 깊은 구렁텅이 속으로 던져 놓자, 아무도 나를 돕지 않았다. 아니 도울 수 없었다. 자포자기와 무기력의 늪만큼 끈적끈적하고 깊은 늪은 없으니까. 



깊은 자학의 늪에서 나를 끄집어낸 건, 한 줄의 글이었다.


고통이 지극해지면 어느 순간 권태가 찾아온다. 게으름과 느림, 시큰둥함과 지겨움, 질림 등 모든 형태의 끔찍한 권태가 나를 휘감았을 때, 따분해하던 내 손가락이 나도 모르는 사이 무심코 문장 하나를 쓴 것이다. 흰 백지 위에 쓰인 문장 한 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가슴이 갑자기 요동치듯 울렁거린 것이다. 눈물 한 방울이 뚝하고 떨어지더니, 갑자기 펑펑 울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눈물에 나를 맡기기로 했다. 눈물이 잦아들 때쯤 노트북 안에 문장들을 쏟아냈다. 그건 마치 변비를 앓다 아주 오랜만에 배설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쏟아낸 문장에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많은 비밀이 숨어 있었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구나. 

그때 난 이런 감정을 느꼈던 거구나.

그렇게 글을 쏟아내며 천천히 치유되어 갔다. 



많은 트라우마 치료자들이 트라우마의 핵심은 서술적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 거라고 말한다. 따라서 치료의 핵심은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기억을 서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환자가 트라우마 사건을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하고 그 기억으로 나타난 영향을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되면 트라우마의 고통이 사라질 수 있다


글쓰기는 치료 효과가 있다.


트라우마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말 대신 글로 서술해 내는 것도 대화를 끌어내는 상담치료와 같은 효과가 있다. 글쓰기에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하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 모든 사실을 깨달을 것도 한동안 매일 글쓰기를 한 후였다. 


최악의 상황이라 여겨질 때,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글을 쓸 수 있다. 모든 걸 뺏긴 사람도 글을 쓸 수 있다. 글쓰기는 우리가 완전히 파괴되는 걸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 마지막 치유제다. 글을 쓰는 한 우리는 그 어떤 트라우마나 고통도 치유할 수 있다. 글쓰기는 우리를 살게 한다.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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