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으로 사랑하기
사랑에 빠진 연인의 손에는 화장실에 갈 때마저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사랑하는 이와 연결되고 싶은 욕구를 각종 모바일 기기들이 24시간 충족시켜 준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약속 시간에 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마냥 기다려야 했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생기면 발만 동동 굴렀다. 한 번의 어긋난 만남으로 영영 헤어지고 마는 운명의 장난도 볼 수 있었다. 요즘은 어딜 가나 영상통화가 가능해 적당히 눈 가리고 아웅 할 수 있는 여지도 줄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해 공들여 한 자 한 자 적은 편지지에 향수 한 방울 뿌려 우체통에 넣고 답장이 되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안타까운 사랑은 이제 역사책 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연인을 몇 시간이고 기다리며 그리움을 키워가는 사랑이나 사랑하는 그녀의 집 앞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녀를 마냥 기다리며 애태우는 사랑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한 연구에서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재미있는 분석을 실행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한 것이다. 트위터를 통해 연인이 된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서로 간에 224개의 메시지를 보냈고, 페이스북의 경우는 70개의 메시지를 보낸 후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7,80년대에 데이트를 했던 부모 세대에서 공식 커플이 되는데 평균 두 달 반이 걸렸다고 하니, 소셜 미디어는 남녀를 연인관계로 이어주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속도도 줄여준 셈이다.
물론 '사랑에 빠지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는 연구 제목이나 그래프 바의 높이는 오독의 여지가 있다. 트위터 그래프 바가 이메일 바보다 7,8배 높아 마치 트위터로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이메일을 통한 것보다 7,8배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메일 한 통 쓸 시간에 트위터 메시지는 열 번, 스무 번도 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다양해진 소통 채널로 사랑 표현 방식이 변하고 그에 따른 사랑의 빛깔이 변한다는 걸 보여준 데에 의미가 있다.
"나는 당신의 글과 사랑에 빠졌어요."
"저는 오랫동안 그 누구와도, 당신과 그랬던 것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나눠본 적이 없어요. 이런 식의 감정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저 스스로도 놀랐답니다. 당신에게 보낸 이메일들에서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에미다운 에미가 될 수 있었어요. … 그냥 거리낌 없이 저돌적으로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그게 너무 좋아요. … 그래서 당신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 문득 세상에 그런 남자가 실제로 있을 수 있을까, 상상하게 하는 그런 남자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 저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 여자는 나를 휘저어 놓고, 들뜨게 한다. 종종 그 여자를 달로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꼭 그 마음만큼 그 여자를 달에서 도로 데려오고 싶어 진다. 나한테는 이 지상에서 그 여자가 필요하다. 그 여자는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고 영리하며 재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온라인에서지만 내 곁에 있다는 점이다."
다니엘 글라타우어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중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는 주소를 잘못 적어 엉뚱한 사람에게 들어간 이메일을 계기로,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오로지 이메일 전문으로만 보여주는 소설이다. 얼굴을 볼 수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오직 상대방의 문장만을 읽으며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상대방을 그려내며 사랑에 빠진다. 이메일은 편지처럼 오래 기다리거나 지체할 필요 없이 실시간 소통도 가능하고, 원할 때는 편지처럼 오래 묵혀 두었다 답을 할 수도 있다. 보거나 들을 수 없으니, 문장에서 상대방을 읽어내려고 더 깊은 집중을 한다. 이메일이라는 소통 방식의 특성 때문에 두 남녀는 서로를 점점 더 이상화한다. 실제로 가까워져서 상처받거나 실망하는 위험은 피하면서도, 서로의 삶의 구멍을 메워주며 연애 초기의 설레고 흥분되는 감정을 충만하게 느낀다.
"흠 많은 피조물의 하나로 당신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당신이 제 아내와 얼굴을 마주해야 비로소, 당신의 우월한 힘이 사라집니다. … 환상의 사랑, 끊임없이 고조되는 감정,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리움, 가라앉을 줄 모르는 열정, 이 모든 것이 현실에서의 만남이라는 하나의 진짜 목표, 지고의 목표를 향하고 있지만, 목표 실현은 번번이 미뤄지고 만남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 아내는 당신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다니엘 글라타우어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중 에미의 남편이 쓴 이메일 중
이메일이라는 소통 방식이 두 주인공의 사랑에 부여해준, 환상과 그리움, 그리고 열정은 만나고 전화 통화를 하는 등 다른 소통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빛깔을 보여준다.
모바일 기기 없이 사랑이란 걸 할 수 있을까? 페이스 북과 트위터, 이메일, 카톡과 에버노트, 스냅챗과 인스타그램 등 사랑하는 연인과의 소통을 연결해 주는 모바일 기기의 지위는 점점 높아지고, 그 파워는 점점 커지고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이메일 한 통을 쓰든, 짧은 트위터 한 줄을 날리든 우리가 사랑을 표현할 때 문장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손으로 연애편지를 쓰던 시절보다 더 빈번하게 문장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시대인지 모른다.
나는 당신의 글과 사랑에 빠졌어요!
사랑하는 이에게 내 마음을 잘 전달하고, 상대의 사랑을 얻는 데도 글쓰기가 빠질 수 없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상대의 인스타그램 스토리나 피드에 하트를 누르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지만,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얻으려면 문장으로 표현해 전해야 하지 않을까. 하트보다는 DM이 낫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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