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주술적인 힘
베이징에 있을 때 Writers in BJ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했다. 8주 과정이 끝나면, 글벗들의 글을 모아 책을 출간했다. 9기 글벗들의 책인 <글쓰기 재테크> 출간 북토크에서 깜짝 공연이 있었다. 무대 위에서 하늘색 튀튀를 입고 발레 슈즈를 신은 여인이 음악에 맞춰 아름답게 춤을 추었다. 그녀는 9기 글벗 중 하나였고, 이제 막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50대 초보 발레리나였다.
선생님, 제가 발레 하는 모습을 상상해 글로 쓴 적이 있는데,
이렇게 진짜로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문장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 문장은 예언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바꾼다. 우리는 그저 글을 쓸 뿐이지만, 내가 쓴 글은 나보다 더 열심히 내 삶을 만든다.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보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내가 원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글을 쓴다.”
조앤 디디온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세히 보면, 그들은 우선 자기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분명히 안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른다. 일단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하면, 어떤 종류의 글을 쓰든 그 안에 자기 자신이 담긴다.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허구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해도,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에 자기 자신의 모습이 조금씩 반영된다. 말하자면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안나와 브론스키 장교, 키티와 레닌 등 등장인물 모두가 작가인 톨스토이라는 말이다. 톨스토이를 이루는 여러 부분들이 잘게 잘라져 등장인물 속에 조금씩 들어간다.
그래서 글을 쓰다 보면 나를 알아야겠다는 목적 없이 썼다 해도, 쓰면 쓸수록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아가게 된다. 나는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어떤 일에 설레는지,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어떤 사람과 있을 때 행복한지 등 나에 대한 다양하고도 디테일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느 날 문득 새벽 세 시에 일어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얻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만이 아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발레나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마흔이 넘은 나이라 모두가 너무 늦었다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릴 적 간절히 원했으나 이루지 못한 꿈이었다는 걸 글을 쓰며 깨달았기에, 늦었지만 그 꿈을 이루고 싶었다. 이미 손이 너무 굳어서 바이올린을 5년 넘게 배우고도 비브라토를 잘할 수 없고, 다리가 너무 굳어서 두 발을 턴아웃하는 1번 포지션도 제대로 할 수 없지만 관계없다. 내가 발레나 바이올린을 배우는 건 발레리나가 되거나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좌절되었던 내 꿈을 뒤늦게나마 이루면서, 오랜 시간 부정되었던 내 열망을 인정해 주자 그제야 정체되었던 내 삶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기쁨이 찾아왔다.
하루키처럼 그리스 같은 곳에 한동안 머물면서 글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글에 담다가 다섯 살, 여섯 살 된 두 아들을 데리고 여름에 한 달 여행을 떠날 용기를 얻었다. 길치인 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해외여행을 하는데, 심지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니 가능한 일일까.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후 계속 행복했던 여행을 반추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9년 동안 매년 여름마다 한 달 살기에 도전할 수 있었다. 심지어 코로나 19가 기승을 부리던 2020년부터 2022년에도 전라도와 중국 하이난 섬, 그리고 아이슬란드에서 한 달 살기에 성공했다.
고음불가에 음치인 내가 아마추어 밴드를 만들어 보컬로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했고, 공연과 버스킹, 라이브 방송 등 즐거운 밴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글쓰기 덕분이었다. Writers in BJ 글벗들과 함께 글을 쓰던 중에 글벗 한 분이 밴드 해보고 싶다는 말을 던졌고, 그 말을 붙들고 바로 실천에 옮기면서 밴드가 조성된 것이다. 악기를 만져본 적도 없는 왕초보들이 몇 달 뒤 공연까지 이뤄냈다.
그 외에도 유화를 배우거나, 커피밖에 몰랐던 내가 다양한 차를 즐기며 차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하는 등 내 삶을 글쓰기와 함께 계속 변화해 갔다.
어떤 글을 쓰든 글을 쓰기 전의 나와 쓰고 있을 때의 나, 그리고 다 쓰고 난 뒤의 나는 다른 사람이다. 쓰는 중에 계속 내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갈수록 나 자신이 점점 명확해지기도 하고, 문장 속에 들어있는 나의 열망이 조금씩 내 삶을 바꿔가기도 한다.
문장을 통해 꿈을 꾸고, 내 문장은 내 삶을 통해 그 꿈을 실현한다. 글을 쓰는 한, 나는 쓰는 대로 산다.
*뮤직비디오를 보고 싶다면
https://brunch.co.kr/@yoonsohee0316/770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