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장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집필실이나 서재, 하다못해 자기 책상이라도 있어야 하는 걸까? 이 질문에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1년 반 정도 수입이 없는 시간을 보내고, 남편이 다시 취직해 첫 출근하던 날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예전에 식탁으로 쓰던 테이블을 내 책상으로 사용했는데, 마땅히 둘 공간이 없어 안방 침대 옆에 놓았다. 두세 살 된 아이들이 잠든 시간을 이용해 글을 써야 했기에,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우지 않기 위해 희미한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글을 썼다.
몇 달을 희미한 불빛 아래 글을 썼더니, 눈이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만의 책상을 포기하고 식탁 한 귀퉁이로 자리를 옮겼다. 좀 더 넓어지고 밝아지기는 했지만, 식탁에서 글을 쓰다 보면 자꾸 일거리가 눈에 띄어 집중하는 게 힘들었다. 식탁 위에서 쓴 원고가 몇 년 뒤 출판되어 책이 되기는 했지만, 자기만의 방이 없던 나는 내 집필실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키워갔다.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이사 갈 때, 처음으로 작지만 내 집필실이 생겼다. 방이라기보다는 창고에 가까운 작은 공간. 한쪽 벽면이 커다란 유리문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빛은 한 줄기도 들어오지 않던 곳. 유리문 바깥의 작은 공간은 창고로 쓰였기에 온갖 쓰지 않는 잡다한 물건들로 그득 찼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흉측한 물건들을 가리기 위해 천을 끊어 커튼을 만들었다. 초록과 흰색 스트라이프가 경쾌해 빛이 없어도 분위기는 꽤 밝아졌다. 그 앞에 예전에 식탁으로 쓰던 테이블을 책상처럼 놓고, 나머지 벽 세 면을 둘러 책을 가득 꽂자 제법 집필실 분위기가 났다. 하지만 그곳은 낮에도 어두웠다. 자기만의 방, 나만의 집필실을 소유하던 2년 동안 나는 매일 그 어두컴컴한 공간에 앉아 있었지만,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았다. 물리적 빛만 부재한 게 아니라, 영감으로서의 빛도 함께 사라졌다.
2년 만에 이사를 하면서, 남편도 나도 자신만의 서재나 집필실을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진짜 채광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는 밝은 서재가 생겼다. 중국의 셋집은 우리나라와 달리 대부분 가구가 비치되어 있다. 그때 머물던 셋집에는 사무용 책상 한 개와 길쭉한 8인용 식탁이 있었다. 남편이 책상을 고르자, 어마어마한 하얀 식탁이 내 책상이 되었다. 나는 밝아진 공간, 넓은 식탁을 무대 삼아 아주 조금씩 잃었던 빛을 찾아갔다.
나만의 집필실이 있을 때는 아예 쓰지 못하던 글이, ‘자기만의 방'을 잃어버리자 조금씩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밝고 커다란 서재와 커다란 책상에서 누리던 작가로서의 호사도 잠시뿐, 나는 허리 디스크 환자가 되었다. 몇 달을 누워서 꼼짝할 수 없게 되자, 환자용 랩탑 테이블이 내 책상이 되었다. 책을 고무줄로 묶어서 잡아 주고 노트북을 올려놓고 누워 쓸 수 있도록 각도 조절이 가능한 작은 책상.
1년 정도 거의 침대에 붙어살다시피 하다 조금씩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다시 의자에 몇 시간씩 앉아 글을 쓰는 건 불가능했다. 꼼짝없이 앉아 글을 쓰는 자세가 허리에 무리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내 커다란 책상 위에 작은 밥상 하나를 올려놓고, 서서 글을 썼다. 누워서 꼼짝 못 하던 시간이 있었기에, 작은 밥상을 앞에 두고 서서라도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할 수 있었다.
“많은 여성 작가들은 카페나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에서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쓸 장소가 집에 없었거나 난방 시설이 열악했거나, 이래 저래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 조앤 K. 롤링도, 그 유명한 시몬 드 보부아르도 그랬다. 반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은 식기와 빵 조각이 어질러진 부엌 식탁에서 글을 썼다. 중국 장가 장지에는 화장실 변기 위에 널판때기를 올려놓고 앉아 6백 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을 썼다.”
타니아 슐리 <글 쓰는 여자의 공간> 중
여전히 글을 쓰기 위해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인간은 몹시 간사해서 그 마저도 절대 넘치면 안 된다는 단서를 붙이고 싶다. 나만의 번듯한 집필실이 생기자 글을 쓰겠다는 간절함이나 절박함을 잃고 쓸 수 없게 되었던 과거의 나처럼, 모든 조건을 갖춘다고 글이 써지는 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집필실이나 책상에 대한 욕망은 없다. 그저 매일 쓰겠다는 이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살살 달래며 그곳이 어디든 나는 글을 쓴다. 내가 글을 쓰는 그곳이 바로 내 책상이고, 내 집필실이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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