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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Feb 15. 2024

똥을 뺄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평범한 삶에서 빛을 찾아내는 글쓰기

어느 주말 오후, 국멸치 한 봉지를 쟁반에 쏟아 놓고 한숨을 쉰다. 


똥을 뺄 것이냐, 말 것이냐?


똥*을 빼지 않으면 국물이 써진다. 결국 멸치를 한 마리씩 들고 속을 가르고 까만 똥을 빼내어 수북이 쌓기 시작한다. 지극히 작고 하찮은 생선인 멸치. 그중에서도 쓸모없는 까만 '똥을 뺄 것이냐 말 것이냐'가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보다 중요한 질문이 되는 삶. 이 어이없도록 하찮고 의미 없음 때문에 잠시 자기 연민에 빠질 뻔했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중



거실에서 놀고 있는 두 아들을 즉시 소집했다. 그리고 멸치 한 마리를 해부하며 가시와 살,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요점인 새까만 똥을 보여주었다. ‘멸치 해부학 개론’이 시작된 것이다.


“엄마, 멸치 머리가 떨어졌어.”

“괜찮아, 어차피 국물 내고 나면 버릴 거야.”


하찮고 의미 없는 일이, 재미있는 놀이가 되고 해부학 공부가 된다. 니체의 말처럼 “사소한 것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고, 모든 것은 의미를 지닌다.


(*실은 멸치 똥으로 알고 있는 검은 부분은 내장이고, 이 부분을 빼지 말고 통째로 먹어야 영양분이 더 높다고 한다)



평범한 삶을 구성하는 작고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을 깨달은 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였다. 큰 주제나 대단한 사건을 위주로 글을 쓰려고 하면 글감 자체를 찾기도 어렵고, 썼다 해도 공허한 글이 되기 쉽다. 오히려 가장 하찮은 것,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일들, 찰나에 스쳐 지나가 채 의미가 되지 못한 것들에 대해 글을 쓰면 읽는 이에게도 공감이 가는 좋은 글이 된다. 글쓰기는 비루한 일상에서 '빛'을 찾아내는 매직이다.


글쓰기는 비루한 일상에서 '빛'을 찾아내는 매직


남편이 남자 친구이던 시절, 작은 보석 상자를 선물한 적이 있다. 중국 비단에 나비와 꽃을 수놓아 만든 보석상자는 앙증맞고 예뻤지만, 거기에 담을 보석이 하나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 작은 상자에 단추를 담기 시작했다. 옷을 살 때 여분으로 딸려 오는 단추부터 어딘가 떨어져 돌아다니는 단추들까지. 이제는 보석 상자가 제법 묵직해졌다.


커다란 진주 모양의 단추,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화려하게 문장이 새겨진 금빛 단추,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단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단추, 꽃이나 나비가 화려하게 그려진 단추, 조개껍데기처럼 오묘한 색깔이 도는 단추, 보드라운 천으로 감싼 단추, 샛노랑이나 형광빛 연두색, 화려한 핑크색 단추들…. 



보석 상자에 담긴 단추들은 색만 화려한 게 아니라, 모양과 크기도 다양하다. 동그랗고 납작한 단추에서 기하학적 모양까지, 지름이 5밀리도 안 되는 작은 단추에서 2,3 센티는 족히 될 큰 단추까지. 단춧구멍 개수도 다양한 단추들이 화려한 보석보다 아름다워 보석 상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쓸모없어진 단추들이 보석 상자에 들어가 진짜 보석이 되었다. 보석도 결국 돌덩이나 광물 조각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라는 걸 생각하면, 단추라고 보석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앞으로도 내 보석 상자에 다이아몬드나 사파이어, 루비 같은 보석이 담길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는 알록달록 개성이 가득한 단추를 보석보다 귀히 여기며 모아 나갈 것이다. 하찮고 무의미해 보이는 삶에서 작은 이야기를 모아 글을 써나가듯이.


쓸모없는 단추가 보석이 된다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고,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행복은 내가 행운을 찾아 헤맬 때도 세 잎 클로버처럼 늘 내 언저리에 가만히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 글을 쓰기 시작한 후 예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감각 기관들을 활짝 열어놓게 되었다. 덕분에 아름다운 바이올린의 연주가 살갗을 가만히 쓰다듬는 걸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아주 미세한 맛 차이를 느끼려고 혀를 살살 굴리다 보면 음식을 만든 이의 기분마저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내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용기를 꺼내쓸 수 있게 되자, 아마추어 밴드를 만들어 공연을 하기도 하고, 멀리 낯선 곳으로 주저 없이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그전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수많은 '세 잎 클로버'들이 가만가만 내 주위를 맴도는 것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걸 알아챌 수 있는 내가 좋다.   


네 잎 클로버 = 행운, 세 잎 클로버 = 행복


오늘도 새벽 세 시면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그날그날 발견한 '세 잎 클로버'를 문장에 담는다. 아마 글을 쓰면 쓸수록 눈은 침침해지고, 허리와 목, 어깨가 점점 더 피로해질 것이다. 거기다 ‘작가의 벽’이란 새하얀 공포까지 마주친다면 달아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새벽 세 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글을 쓰고 싶다. 내게 와준 소중한 '세 잎 클로버'들을 문장에 담아 아직 자신의 '세 잎 클로버'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에게 슬며시 건네주고 싶기 때문이다.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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