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사람은 누가 자기를 사랑하는지에는 무관심하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느냐만 중요할 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목매달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자기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누군가의 가슴에는 서슴없이 못을 박는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쏘아대는 화살표 같다. 우연히 두 사람의 화살표가 일치하면 우리는 그걸 '밝은 행복'이라고 부른다.
누군가를 짝사랑해 본 후에야 비로소 후회하게 된 일이 있다. 도서관에서 쪽지를 건넸던 남학생이나, 길 가다 말을 걸어오며 커피 한잔 하자던 사람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시했던 일들. 사랑이란 첫눈에 벼락 맞은 듯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환상 때문에, 첫눈에 느낌이 오지 않으면 내 짝이 아니라 단정했었다. 오지 않는 전화를 마냥 기다리며 눈물을 흘려 본 뒤에야, 나 때문에 울었을 누군가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한때 레몬의 강한 신맛을 좋아해서 레몬 조각을 덥석 베어 먹기도 했다. 신맛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은 레몬을 입에 대지도 못하고 말만 들어도 찡그릴지 모른다. 오래 씹어보기는커녕 입에 넣거나 향을 맡는 것마저 감내할 수 없는 음식이 있듯, 아무리 노력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상대가 내 사랑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슴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그럴 땐 상대를 놓아주어야 한다. 물론 충분히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떠나보내는 의식을 치러야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상대를 억지로 곁에 붙들어 두어서는 안 된다.
끔찍한 스토킹 사례들을 종종 뉴스로 본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잔혹한 행동들을 잘 들여다보면, 과연 진짜 사랑일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사랑 표현은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더라도 사랑이 아니다. 나 역시 스토커에게 이메일을 해킹당해, 나와 이메일을 주고받던 많은 지인들이 불쾌한 협박 메일을 받는 일을 겪은 적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누군가 내 생활을 통제하려 한다는 생각 자체가 주는 공포감은 정말 끔찍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아프게 기억되는 걸 보면, 스토킹은 분명 상대나 자신 모두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범죄 행위다.
만일 내가 타자에 의해서 사랑을 받아야 한다면, 나는 사랑받는 자로서 자유로이 선택되어야만 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관련된 통상적인 용법에 따르면 '사랑받는 자'는 '선택된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 선택은 상대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실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르트르 <존재와 무> 중
힘을 이용해 누군가를 곁에 붙들어 두는 건 가능하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 상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강요된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치 화려하고 예쁘지만 향기도 생명도 없는 조화를 곁에 두는 것과 비슷하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에 드러나듯, 인간에게 자유는 생명만큼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날 선택해 주는 사랑이 아니라면 그런 억지 사랑은 거짓일 뿐, 사랑이 아니다. 거짓 사랑에서는 상대도 나도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아주 오래된 영화 중 <Boxing Helena>가 있는데, 제목을 직역하면 '헬레나 가두기' 정도가 될까. 국내에는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라는 달콤한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한국어 제목에서 기대하는 내용과 달리 소유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파괴적인 욕망을 다룬 영화다. 외과 의사인 주인공이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헬레나의 팔과 다리를 절단해 인간 토르소로 만든 뒤, 자기 집에 가두고 자기 방식으로 지극 정성을 다해 사랑해 준다는 끔찍한 내용의 영화다.
자기 사랑을 받아 주지 않는 상대에 대해, 또는 변심한 연인에 대해 분노하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깊이 사랑했다면 거부나 배신으로 인한 상처가 깊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이 당한 고통만큼 돌려줌으로써 감정의 균형을 잡으려는 사람은 정말 상대를 사랑한 걸까. 사랑하면서 입은 자존심의 상처를 되돌려주려고 칼을 들이댈수록 결국 더 깊게 베이는 건 자기 자신인 걸 보면, 복수란 말이 무색해진다. 결국 증오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사랑과 증오를 종종 동전의 양면에 비유한다. 사랑의 강력한 에너지가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꾸면, 상대방과 나 자신 모두를 파괴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증오로 바뀐다.
너무 사랑해서 용서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 아름다운 꽃을 곁에 두고 싶어 꽃 모가지를 꺾어버리는 마음. 며칠 안 되어 그 꽃이 시들어 죽어버릴 거라는 걸, 그러면 더 이상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꽃을 꺾는 마음. 이런 파괴적인 열망을 사랑의 열정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물론 '질투가 없으면 진정 사랑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나, '상대의 전 존재를 오롯이 갖고 싶은 열망이 사랑'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진심이 담겨 있는 걸 부인하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적절한 경계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사랑하는 상대와 나 자신을 살리는 일일지, 아니면 무너뜨리고 파괴하는 일일지 늘 스스로에게 묻고 또 가늠해 봐야 한다.
생각해 보면
두려움은 사랑의 철조망일 뿐
불안이 안개처럼 드리운다는 것은
그대에 대한 나의 사랑이 모자란 까닭입니다.
사랑은 누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를 놓아주어야
비로소 그대가 내게 다가올 수 있고
나 또한
그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울리히 샤퍼 <그대에게 자유를 드리겠습니다> 중
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바람피울 수 있는 자유, 떠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만큼 사랑에 자유가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상대를 소유하려는 순간 사랑은 시들고 상대방은 달아나고 싶어 진다. 마치 생명에서 죽음으로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것처럼. 사랑하는 상대는 절대 소유할 수 없고, 소유하려 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지극히 자유로운 영혼 간의 관계다.
만약 지금 사귀는 상대가 자꾸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만든다면, 진정 그 사람이어야 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상대의 과거를 계속 언급하며 집착하거나, 누군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속박한다면 그런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게 낫다. 두 사람이 진정 사랑한다면 그 사이에 옛 연인이나 제삼자가 끼어들 여지는 없을 테니까.
억지로 포용하라는 말은 아니다. 어느 한쪽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모든 걸 받아주고 참는 것도 결국은 상처를 더 곪게 만드는 일일 뿐이니까. 부모가 아이를 과잉보호하면 아이가 제대로 된 어른으로 자라지 못하는 것처럼, 한 사람만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도 그 관계를 망칠 수 있다.
좁은 새장으로 어떻게 새를 자유롭게 키우고 또 사랑할 수 있을까.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내 안에서 자유롭게 날 수 있도록, 자신이 점점 더 넓어지는 것! 그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중요한 건 '절대적 자유'가 아니라,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자유'니까. 사랑하는 연인이 자유롭게 날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우주처럼 크게 확장해 보면 어떨까.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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