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Mar 04. 2024

섹스는 영혼의 실을 엮어 직물을 짜는 일

섹스

세상의 무수히 많은 매체들이 섹스에 대해 많은 말을 쏟아내고, 우리는 그걸 좋든 싫든 수없이 보고 듣게 된다. 섹스가 감각의 쾌락을 좇는 유희로 또는 욕망의 찌꺼기를 배설하는 창구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다. 나는 섹스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한다. 영혼을 걸고 하는 커뮤니케이션.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뿐이지 섹스는 그 자체로 완벽한 소통이 가능하다. 서로의 숨소리와 작은 떨림, 평소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아주 많은 것들을 통해 상대의 감정과 사고, 그 외 모든 것, 한 마디로 상대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연인이 나에게 소중하다면, 그것은 내가 오직 그에게만 나의 경계를 열 수 있고, 오직 그만이 나를 위해 자신의 경계를 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두 개체는 서로 연속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한다.

조르주 바타이유 <에로티즘> 중


성감대가 어디고, 어떻게 자극하고 등의 지식들이 때로는 의미가 없어진다. 한 사람에게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같은 상대라도 시간과 장소에 따라 성감대가 변한다. 손길 하나 입김 하나에도 의미를 담을 수 있기에, 서로에게 집중하며 그 의미를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 소통이 잘 되는 섹스를 하고 나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 것보다 더 친밀해지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자신의 말초적 욕망만을 채우려 든다면, 아무리 격렬한 섹스를 하고 현란한 테크닉을 동원했다 해도 충만한 만족감을 느끼기 어렵다. 오히려 그 뒤에 밀려오는 허무감을 이기기 힘들다.



세상은 성에 관해 끊임없이 금기를 만들고 나의 성에 도덕이란 잣대를 들이대지만, 우리가 진정 죄책감을 느껴야 할 때는 소유권을 행사하듯 성으로 상대를 지배하고 억압할 때와 상대의 자유를 빼앗을 때다. 소통이 안 되는 꽉 막힌, 그야말로 동물적인 섹스야말로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벌이 이 꽃 저 꽃을 옮겨 다니듯 상대를 바꾸며 자유연애를 하라고 부추기는 건 아니다. 어떻게 내 영혼과 육체를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며 소통이 잘 되고 깊이 교감할 수 있는 상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까. 사실 망망대해에 가느다란 낚싯줄 하나 드리운 것처럼 막막한 일이다. 하지만 절대로 저인망 어선이 그물에 물고기를 쓸어 담듯 하면 안 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론적으로는 많은 상대를 경험하면 분명 서로 비교를 통해 내게 맞는 상대를 더 쉽게 찾을 듯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섹스는 서로의 영혼의 실을 엮어 직물을 짜는 일과 같으니까.



부부나 연인 간의 섹스뿐 아니라, '뭐 이런 것쯤'하며 돈 주고 산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와 짧게 나눈 섹스조차도 내 영혼의 실을 풀어 상대와 엮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세밀하고 촘촘한 아름다운 직물부터 거칠고 조잡한 직물까지 다양한 영혼의 직물이 있겠지만, 그 어느 경우에도 헤어질 때 내 영혼의 실을 고이 풀어 온전히 갖고 돌아올 수는 없다. 원치 않더라도 찢긴 영혼의 실 조각을 남기게 된다. 그래서 많은 상대와 섹스를 하면, 다양한 쾌락을 경험하고 많은 경험을 쌓은 것 같은 착각이 잠시 들지만, 어느 순간 여기저기 떨어져 나간 내 영혼이 너덜너덜해지고 황폐해 감을 느끼게 된다.


평생 단 하나의 상대를 만나 평생 한 사람과 섹스를 해야 한다고 고리타분하게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매 순간 기회가 왔을 때,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으면 좋겠다.


지금 여기에 내 영혼의 실을 흘려 놓아도 괜찮을까?


소중한 내 영혼의 실로 짠 직물이 누군가의 발부리에 툭툭 걷어 채는 걸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내 영혼도 황폐하고 메말라질 테니까.


특히 돈을 주고 성을 사는 곳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남긴 영혼의 실이 다른 이의 더러운 발에 짓밟히고 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누군가의 원망과 저주의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든,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서든, 돈을 받기 위해 자신의 성을 파는 이들이 아무리 '그저 일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해도 매 순간 영혼이 뜯겨나가는 건 막을 수 없다. 어느 순간 피폐해진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돌아보며 후회와 원망, 저주를 퍼부을 때, 아무리 이름도 성도 모른다 해도 동참했던 이들이 그 원망과 저주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영혼의 언어로 서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내 영혼의 짝을 만나, 오래도록 정성 들여 섬세하고 아름다운 직물을 짜내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랑하는 연인의 새로운 어휘를 배우기 위해 가슴 설렘으로 한 마디 한 마디 읽어내는 일, 서로의 독특한 실을 씨실과 날실로 촘촘히 엮어가며 새로운 문양을 만들어가는 일, 그 하나하나의 문양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어가는 일을 보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결혼이 지니는 함정은 습관이다. 위반의 부재는 관능의 부재를 야기한다.

조르주 바타이유 <에로티즘> 중


가장 아름답고 거대한 예술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배우자와의 섹스에서 아무런 감동 없이 습관처럼 똑같은 문양만 만들어낼 수 있다는 데 바로 그 함정이 있다. 위대한 걸작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뇌하며 새로운 것을 시도해야 한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예술가들처럼, 배우자와 함께 엮어내는 작품을 위해서는 예술가와 같은 창조적 에너지와 열정이 필요하다. 배우자와의 섹스를 통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싸구려 천이 아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아내와 남편 모두 늙어가고 싱싱하던 육체의 아름다움은 점점 빛을 잃을 텐데,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계속 배우자에게 매혹될 수 있을까? 어떻게 매일매일 똑같은 모습을 보며 새로운 욕망을 느낄 수 있을까. 


한 가지 팁이라면, 내 욕망은 내가 '보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상상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내 안에는 인식하든 못하든 무한한 상상과 창작의 에너지가 숨어 있다. 심지어 옷을 벗지 않고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충만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 내가 배우자의 영혼과 육체를 사랑하며 그 안에서 기쁨을 이 끌어낼 마음만 있다면, 배우자는 내게 무한한 기쁨을 선사할 수 있다. 배우자보다 먼저 내가 배우자에게 언제 봐도 안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 번 불붙어 활활 타오르다 금방 식어버리는 매력이 아니라, 끊임없이 아내를 새롭게 자극할 수 있는 매력적인 남편, 남편을 매혹시킬 수 있는 아내가 되는 일은 멋지지 않은가.



정말 귀한 선물이라면 바로 그 자리에서 포장지를 북북 찢어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물을 고이 간직했다 진정으로 빛이 나는 아름다운 영혼의 직물을 엮어내기를.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이전 14화 가두고 묶어 두는 게 사랑이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