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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Feb 12. 2024

아름다운 고문, 더 아름답게

키스

언제 마지막으로 키스했죠?


언젠가 토크쇼에서 한 여자 개그맨이 이 질문을 받고 당황하던 모습이 또렷이 기억난다. 사랑하는 이가 저세상으로 가버린 것도 아니고, 매일매일 얼굴을 맞대고 사는 삶에서 그런 질문에 답할 수 없다는 건 어쩐지 슬프다. 섹스는 하면서도 키스는 하지 않는 부부. 그들의 입술은 방부제 때문에 썩지는 않아도 이미 무덤에 갇힌 시체처럼 푸석거린다.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같은 동화책 마지막 장면에는 잠들어 있는 공주의 입술에 키스하는 멋진 왕자가 등장한다. 왕자가 키스를 하면, 공주는 깨어날 가망이 없던 잠, 곧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돌아온다. 키스는 죽어 있던 영혼에 생명을 불어넣는 묘약인 셈이다. 키스가 먹고사는 문제와 관계없다고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평생 키스를 할 수 없다면 이미 무덤에 갇힌 시체나 다름없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사랑과 생명의 상징인 키스가 없는 삶은 살아도 진정 살아있는 삶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사랑을 주는 일은 생명을 주는 일이다. 사랑에는 한낱 가벼운 감정일 뿐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있다. 이런 위대한 사랑은 언제나 달콤한 키스로 시작된다. 얼마나 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전혀 가망 없는 사랑에 목매달며 연인에게 키스할 수 있기를 기다리던가.


섹스는 그것 자체가 핵심이고 뼈대며,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키스는 욕망의 극치고, 시간이 걸리는 일이며, 연애의 달콤한 수고 가운데 영혼을 확장하는 행위다. 키스하는 동안 몸은 떨리고, 기대는 점점 높아진다. 그러나 키스는 감정과 정열을 더욱 고조시킬 뿐,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 아름다운 고문이다.

다이앤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중



아름다운 고문. 키스는 잔소리하는 우리의 이성을 잠시 잠재우고 잠들어 있던 우리의 육체를 깨운다. 키스의 아찔한 느낌에 몸을 내맡기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는데, 이때 시각 조절 기능과 통제력을 완전히 잃을 수 있기에, 키스는 상대에게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행위다. 상대를 맛보고 냄새 맡는 키스를 위해서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 안으로 들어가야 하니 사랑과 신뢰, 기대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말로만 표류하려는 사랑을 입술로 덮어 행동과 영혼을 불어놓는 게 바로 키스다.



키스는 단지 입술의 쾌감만은 아니다. 그것은 호흡이며 한숨이고 절대의 추구다. 키스는 동상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잠을 깨운다. 그렇지만 키스는 무한을 꿈꾸고, 욕구의 (불가능성과) 적나라한 모습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키스의 권력은 위험한 것이고, 키스라는 사랑의 묘약은 때로 독약이 되는 것이다.

세실 바즈브로 <키스를 위해 죽기...> 중


키스는 단순히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게 아니라, 사랑을 위해 자신이 온몸과 마음을 바쳐 연주하는 음악이다. 자신의 인생과 영혼을 걸고 연주하며, 심지어 죽음까지 감수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키스 한 번에 무슨 죽음까지? 심지어 따라 죽겠다고 줄리엣의 입술에 남은 독을 키스로 빨아들이려 했던 로미오도 키스로 죽지는 않았는데. 믿기지 않겠지만, 실제로 키스 한 번으로 죽은 사람들이 있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던 사람이 키스를 통해 상대 입속에 남아 있던 땅콩 가루를 흡입하면서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호흡곤란이 와 사망한 사례들이 있다. 우리 입속에 있는 수많은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떠올린다면, 키스를 과연 목숨 걸지 않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 땅콩 알레르기만 아니라면, 오히려 침 속에 있는 항생물질이 키스를 통해 교환되면서 육체의 고통을 줄여준다고 하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교환된 세균들은 소화기능을 활발하게 하고, 침에는 진통제인 구르판보다 3~6배 강력한 면역물질이 있어서 키스를 자주 하면 감기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매일 아침 아내와 키스를 하는 남자들이 그렇지 않은 남자들보다 평균 5년은 더 오래 산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과학이 은밀하고 아름다운 키스에마저 현미경을 들이대고 분석하고 있지만, 역시 키스는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 남겨 놓는 게 낫지 않을까.



키스는 키스 그 자체보다 키스를 할 수밖에 없는 그 분위기가 달콤한 게 아닐까 싶다. 키스는 지금 당신과 함께하는 이 분위기가 로맨틱하고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상대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며 몸이 뜨거워지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에 가 닿아 있는 내 입술을 발견하는 것. 바닷가에서든, 도자기 가마 앞에서든, 수영장 물속에서든, 자동차 보닛 위에서든, 엘리베이터 안에서든, 비가 퍼붓는 허름한 뒷골목에 거꾸로 매달린 채든 (거꾸로 매달린 채 하는 키스는 역시 스파이더맨이 아니라면 어렵겠지만.) 어디든 관계없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서두르는 실수만은 하지 않기를.



입을 살짝 다문 채 시들이 부리를 마주 부딪치듯 하는 키스

상대의 입술 한쪽을 내 입술 사이에 끼워 물고 하는 키스

상대의 입속에 공기를 불어넣었다가 빨아들이는 키스

입속에 들어온 상대의 혀를 살짝 깨물어주는 키스

입술 전체를 덮어 버리는 키스

두 영혼을 합치듯 서로를 빨아들이는 진한 프렌치 키스



키스에 기쁨이나 열정, 욕망, 사랑, 헌신, 평화, 안락함, 슬픔, 애원 등 어떤 감정을 담든 생각은 싹 지워버리고 머리와 가슴이 몸을 따르는 게 좋다. 그 황홀한 순간만큼은 내 몸이 내 머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머리가 앞서면 키스를 하면서 눈을 뜰 수도 있고, 내 현의 움직임을 머리로 조절할 테고, 그러면 그만큼 낭만과 순수를 잃게 된다. 가슴에서 솟는 뜨거운 열정과 분위기에 따라 몸이 이끄는 대로 모든 걸 맡길 수 있어야 달콤한 행복이 찾아온다. 항상 사랑의 감정을 가슴 아프도록 절절히 느낄 수 있고, 손끝이 저릴 만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을 날카롭게 벼리는 것도 전적으로 내게 달린 일이다.



스치듯 아쉬운 입맞춤이든,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격렬한 키스든 삶에서 다양한 빛깔의 아름다운 키스를 많이 간직할 수 있기를! 단 취중 키스만은 말리고 싶다. 취한 상태에서 하는 키스에는 진실도 진담도 없다. 설사 그 키스가 폭풍같이 격렬한 감정을 몰고 와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술이 불러일으킨 오해고 착각이다. 순간은 달콤할 수 있어도,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갈 수도 있는 거짓 키스다. 



여자들에게 키스는 남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훨씬 더 중요하다. 여자들은 남자를 계속 만날지 말지를 키스할 때의 냄새와 맛의 기억으로 판단할 정도로 키스를 중시한다. 물론 의식의 영역이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에서 판단하는 거라 자기 자신도 모를 수 있지만. 마음을 얻고 싶은 여자가 있다면, 온 마음을 다해 아름다운 키스를 선물하자. 절대로 서두르면 안 된다. 상대가 마음 문을 활짝 열 때까지.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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