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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an 29. 2024

시선을 느끼고, 눈길을 보낼 줄 아는 사람

시선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버스와 함께 흔들리는 중이다. 응당 창문을 향하고 서야겠지만, 몸을 돌려 버스 안쪽을 향해 고집스럽게 서있다. 한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깊은 눈매는 들여다볼수록 아름다운 추억이나 사연이 있는 듯하고, 콧날과 턱선이 반듯한 아름다운 얼굴. 줄곧 옆모습이던 그의 얼굴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0.0001초의 지체도 없이 무심히 지나쳐 다른 곳을 응시한다.



이럴 수가... 분명 시선이 마주쳤는데, 그의 시선은 아주 잠시의 지체도 허락하지 않고 지나갔다. 누군가를 응시한다는 건 그것이 사랑이든, 호기심이든, 적의든, 공포든, 적극적인 감정 표현이다. 강렬한 응시를 받는 사람은 불에 덴 듯, 또는 마음속 무언가가 뚝 부러진 듯 강한 자극을 받는다. 눈싸움이 그토록 힘든 이유다. 그런데 그는 직접적이고 강렬한 내 시선에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았다. 혼자만 유별나게 몸을 돌려 서 있는 내게 눈길 한 번 멈춰주지 않았다. 


내가 버스에서 잠시 마주친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이토록 오랜 시간 기억하는 건 그의 시선 때문이다. 그 무심한 눈길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그 일은 마음에 조용히 상처를 남겼다. 엄청난 수고나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의 하루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눈길 한 번 다정하게 건네주면 안 되는 걸까.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면, 의식하지 못하지만 내부에서 엄청난 갈등이 일어난다. 상대의 시선에 계속 눈을 맞추고 싶다는 욕망과 동시에 어서 눈을 돌려 피하고 싶다는 욕망이 부딪히며 전쟁이 일어난다. 그 결과 두 개의 시선이 이곳저곳으로 얽히고설키는 아주 복잡한 움직임이 전개되는데, 아이 트래킹 데이터를 보면 1,2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도 시선이 수백 번 움직이며 복잡한 점들이 찍힌다. 겨우 두 개의 변수뿐이지만 사람은 시선만으로 엄청나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또 읽을 수 있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의 시선을 보면, 처음에는 부끄러움의 단계로 시선을 빨리 두며 눈이 마주치는 것을 주저한다. 다음 단계는 곁눈질의 단계로 얼굴은 엉뚱한 다른 곳을 향하면서 눈으로만 상대를 흘긋 쳐다본다. 이런 곁눈질을 추파라고 하는데, 상대를 유혹한다는 메시지로 보통 읽힌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애정의 정도에 따라 상대방을 직접 쳐다보는 시간이 극적으로 늘어난다. 상대가 매력적이라고 느낄수록 눈을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누군가를 흠모하고 있다면 그 상대로부터 눈을 뗄 수 없다.




당신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요.


미니스커트가 늘씬한 다리를 더 돋보이게 하네요.
그렇게 멋진 넥타이를 고르다니 센스 있는걸요.



바쁜 아침에 신경 써서 넥타이를 골랐을 그의 선택을, 늘씬한 다리를 위해 편한 차 대신 지하철을 택한 그녀의 노력을, 관심 어린 눈길 한 번으로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다면 삶에 얼마나 많은 생기를 더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호의가 담긴 눈길 한 번으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쫙 펴지고, 런웨이를 걷듯 걸음걸이가 당당해진다. 우리가 서로에게 눈길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금보다 더 아름다워질까.


프랑스에서는 남자들이 당신을 쳐다봅니다. 즐거운 일이에요. 심지어 여자들도 쳐다봐요. 물론 항상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신을 인정해 주는 거잖아요. 누군가가 당신을 보고 있다면 걸음걸이부터 달라질걸요. 내가 미국에서 그리워한 게 바로 그거예요. '눈길'이요. 미국 여자들이 살찐 건 그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일레인 사이올리노 <프랑스 남자들은 뒷모습에 주목한다> 중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을 살펴보면,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시선을 피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딱히 졸린 것도 아니면서 눈을 감아버리거나, 우연히 시선이 마주치면 몹쓸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른 시선을 돌린다. 삶이 찌들고 지쳐서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어쩌다 눈길이라도 보낼라치면 성희롱이나 치한 취급받을 수도 있으니 눈길을 거두는 게 속 편하다. 눈길을 받는 사람도 자신의 매력을 인정해 주는 호의적 눈길에 가벼운 눈웃음이나 미소로 답례할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지만, 혹시라도 답례의 웃음을 유혹의 추파로 인식할까 두려워 섣불리 답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미 우린 불신사회에 살고 있다. 주위 모든 사람을 잠재적 범죄자로 가정하고 경계하는 사회.


지하철 안에서 눈이 마주쳐 살짝 웃었더니, 답례로 미소를 짓는 거예요.
그 여잔 분명 프랑스 인이었을 거예요.


지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동의했다. 내가 아는 프랑스인들도 누군가의 매력을 인정하고 관심 어린 눈길을 던지고, 또 다른 이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매혹적으로 가꿀 줄 아는 사람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팽팽한 긴장과 설렘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한국은 분명 시선을 많이 느끼는 나라 중 하나다. 동네 슈퍼마켓에 갈 때도 화장을 하고,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게 옷차림도 신경 써야 한다. 해외에 나오면 화장도 생략하고 옷차림도 자유롭게 하고 다니다 갑자기 한국말이 들려오면 순간 멈칫하고 나 자신을 돌아본다. 집 앞에 우유를 사러 갈 때도 화장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가까운 거리를 걸을 때도 누군가 나의 매력을 알아봐 주고 호의적인 눈길을 보낼 수 있다는 설렘에 거울을 보는 것과 누구나 다 하는 화장을 안 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게 될까 두려워 억지로 거울 앞에 서는 것은 천국과 지옥만큼 차이가 크다.


바쁜 일상 속에 무의미하게 스쳐가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 안에서 누군가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알아봐 주고 호의가 담긴 눈길 한 번 보낼 줄 아는 사람. 시선하나로 그 누군가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물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구속받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자만이 그런 자신감 넘치는 시선을 보낼 수 있다. 어떤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감동할 줄 알고, 그 대상에게 적절한 찬미를 보낼 수 있는 사람만이.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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