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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Feb 05. 2024

내 비밀을 누구에게 얼마나 공개해야 할까

비밀

아름다운 얼굴과 머릿결, 우아한 손놀림과 자태. 어느 하나 흠 없는 엘로이 양을 흠모하던 머치슨 경이 마침내 엘로이 양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머치슨 경은 엘로이 양을 만날 생각에 설레는 가슴을 안고 집을 나선다. 저 멀리 드디어 아름다운 엘로이 양이 보인다. 은은한 꽃무늬가 새겨진 우아한 스커트 자락의 사르락 소리가 머치슨 경의 귀에 들린다. 하얀 레이스 양산을 쓰고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엘로이 양. 머치슨 경은 엘로이 양을 크게 부르려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조용히 엘로이 양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골목을 돌고 돌아 마침내 엘로이 양이 멈춘다. 문 앞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던 엘로이 양은 양산을 접고 황급히 문 안으로 들어간다. 머치슨 경은 방망이질 치던 심장이 갑자기 쿵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오후 두 시, 허름한 호텔.

아름다운 엘로이 양은 도대체 저 안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오래전 읽은 소설인데 한동안 제목도 작가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혀 무관해 보이는 미술 관련 책을 읽다 우연히 이 소설이 오스카 와일드의 <비밀 없는 스핑크스>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찌나 기뻤던지. 굳게 잠겨 있던 스핑크스 비밀의 문이 갑자기 활짝 열린 느낌이었다.


허치슨 경은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같은 시각 엘로이 양의 뒤를 밟았다. 엘로이 양은 매일 같은 시각에 호텔로 들어가 한두 시간 후 집으로 돌아갔다. 허치슨 경의 가슴은 무너졌고 결국 엘로이 양에게 매일 무엇을 하는 거냐고 따졌지만, 엘로이 양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실망과 배신감으로 허치슨 경은 엘로이 양을 떠났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엘로이 양이 독감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허치슨 경은 가슴 아픈 옛 추억이 되살아나, 엘로이 양이 매일 드나들던 호텔로 찾아갔다. 그리고 드디어 진실이 밝혀진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가 베일에 가려진 소설 속의 비밀스러운 여주인공이 되어 직접 그런 환상을 즐기고자 그 방을 빌린 것뿐이었지. 그녀는 뭐랄까, 그저 무언가 미스터리한 것을 열망했던 거라네. 그렇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비밀 없는 스핑크스였던 셈이지.

오스카 와일드 <비밀 없는 스핑크스> 중



수많은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을 천체망원경으로 자세히 보면, 각각의 별들은 빛깔도, 밝기도, 크기도, 지구와의 거리도 제각각이다. 마찬가지로 세계 80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이라도,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독특한 별이다. 나라는 사람이 유일무이한 개인으로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비밀이다. 어린 시절, 사소한 일까지 엄마나 가족들에게 시시콜콜히 이야기하던 시가가 지나고, 갑자기 방문을 닫고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진다. 비밀 일기장이 생기고 비밀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나라는 개인이 만들어진다. 나만의 특별함을 깨닫고 다듬어가는 일은 평생의 과제이자 가장 중요한 숙제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이상 <실화> 중

사람은 누구나 주체적인 한 사람이 되기 위해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다. 엘로이 양에게 사랑이나 결혼보다 중요했던 건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비밀의 방을 만드는 건 나 자신이 되는 첫걸음이다. 세상에 꺼내 보일 만큼 무르익지 않은 생각이나 철학, 아직 미숙한 감정 등을 그 방에 담아 두고 숙성시켜 나간다. 부모나 연인에게도 함부로 보여줘서는 안 된다.



특히 창조적인 일이나 상상력을 요구하는 일이라면 비밀의 방에 꼭꼭 감춰두는 게 좋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라 해도 제대로 무르익기 전에 세상에 나오면 비난의 난도질에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심지어 칭찬조차 본래의 추진력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 탈고 전에는 쓰고 있는 글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데, 그것도 같은 이유다.



나의 비밀이 소중하듯 다른 사람의 비밀도 소중하다. 다른 사람의 비밀에 함부로 침범한다는 건 독립된 영토에 침범해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엘로이 양의 경우처럼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상대방의 비밀을 존중해 준다는 건 그가 독립된 인격체라는 걸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다. 허치슨 경이 만약 엘로이 양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비밀의 방을 열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면, 어느 순간 엘로이 양이 직접 비밀의 방으로 그를 데려갔을지 모른다. 


비밀을 간직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비밀을 절대 밝힐 수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폴 투르니에 <비밀> 중




자기만의 비밀을 갖고 독특한 자아의 독립성을 형성해 가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비밀의 진정한 가치는 고백에 있다. 내 비밀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선택된 사람에게만 비밀의 방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여줄 때가 가장 찬란한 순간이 아닐까. 비밀을 공유할 때 그 사람과 인격적으로 연결되며 한 단계 더 성숙한 내가 된다.


홀로서기 위해 비밀의 방을 만들지만, 평생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건 결국 또 다른 족쇄로 나를 묶어 놓는 일이다. 비밀의 방을 절대 열지 못하는 사람만큼이나 너무 쉽게 여는 사람도 온전한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모든 내용은 말해야 할 적당한 때가 있다. 즉시 말해야 할 것이 있고, 재빨리 붙들어야 할 기회가 있다. 그리고 뒤로 미루어야 할 것이 있고, 표현하기 전에 좀 무르익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이 있다. 타인에게 자신을 열어 주어야 할 때가 있고, 타인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침묵을 존중해야 할 때도 있다.

폴 투르니에 <비밀> 중



결국 누구에게 비밀의 방을 언제, 얼마만큼 열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내 자유와 성숙을 걸고 펼치는 예술이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동안 비밀의 방에서 다듬고 만들어온 내 인격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비밀을 공유할 영혼을 찾아내고 가장 적절한 시점에 공유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나라는 고유한 자아가 비로소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된다.



누군가 내 손을 붙잡고 자기 비밀의 방문 앞에 데려가거든, 가슴과 귀를 활짝 열고 경청하자. 그 찬란한 순간을 함께 해준 상대에게 감사하면서. 누군가의 비밀을 알게 된다는 건 하나의 관계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내 영혼에 그만큼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다. 단, 상대의 비밀을 알게 됨으로 얻게 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면 안 된다. 경솔하게 휘두른 칼에 상대만 상처 입는 게 아니라 나 자신도 베이게 되니까.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비밀의 방문을 열고 소중한 비밀을 정돈해 본다. 주파수가 맞는 영혼을 발견한다면 조심스럽게 열어봐야지.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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