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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Jul 22. 2024

가벼운 아량, 과장된 생색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다

용서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괴로워본 적이 있는가. 두 아들을 살해한 원수의 구명을 탄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원수를 양자 삼고 사랑해 줌으로써 아름다운 용서의 전형을 보여준 손양원 목사. 우리는 많은 용서 미담을 듣고 감탄하며, 용서는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고 자책하거나 부끄럽게 여기며, 안 그래도 고통스러운 심경을 더 후비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가만두지 못하고 자책하거나 부끄럽게 여기며, 안 그래도 고통스러운 심경을 더 후비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누구나 용서란 훌륭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번 전쟁 때처럼 실제로 용서해야 할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러나 정작 용서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용서라는 말만 꺼내도 화가 나서 으르렁거리게 마련입니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중


누군가 거리에서 실수로 내 발을 밟았을 때, 내 지갑을 소매치기했을 때, 내 배우자와 친구가 바람피운 걸 발견했을 때, 내 아내가 딸이 성폭행을 당했을 때, 내가 고문을 당했을 때... 서로 다른 피해 상황으로 인한 상처는 그 넓이와 깊이가 모두 다를 것이다. 용서에 따르는 고통의 깊이도 모두 다르다. 그 모든 다름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용서는 하나같이 어렵고 고통스럽다. 부당한 상처를 입고도 가해자에게는 자비를 보여야 하고 동시에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일이 용서니까.


어떤 경험들은 우리의 인격을 부서뜨리거나 산산조각내기도 한다


어떤 경험은 우리의 인격을 부서뜨리거나 산산조각 낸다. 고문이 가장 극단적인 예다. 고문뿐 아니라 육체적, 성적, 언어적 폭력과 모욕감을 주는 말과 행위로 피해자가 자신의 정체성조차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묻지 마 범죄의 피해자들은 대개 자존감과 자신감을 상실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와 자기 모멸감을 겪으며 살아간다. 힘 있는 자가 마구 휘두른 가혹한 협박과 폭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극도의 자괴감과 함께.


용서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만, 용서는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용서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만, 용서는 생각만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처음 와본 낯선 곳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의아한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M이었다. M은 남편과 동업했던 파트너였다. 포브스 잡지에 실릴 정도로 주목받던 벤처기업으로, 경쟁 업체를 인수하며 급속히 성장하던 회사였다. 글로벌 금융 위기와 벤처 붐의 급속한 냉각으로 예정되었던 투자가 갑자기 취소되고, 중국 정보의 갑작스러운 법률 변경으로 현금흐름에 문제가 생겼다. 채권자들의 독촉으로 집에도 있을 수 없어 남의 집에 숨어 몸을 피하고 있을 때였다. 함께 책임지고 어려움을 헤쳐가야 할 파트너 M이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회사를 나갔다. 게다가 같은 중국인 채권자들에게 우리가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흘렸다. 덕분에 두세 살 된 아이들과 함께 인질로 잡히기도 하고, 전 재산이던 집 한 채도 고스란히 빼앗겼다. 

"잘 지내는 거죠?"

"뭐, 그럭저럭."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 말은 내게 할 말이 아니라 남편에게 직접 해야 할 말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어정쩡하게 괜찮다고 말했을 뿐. M을 용서하든 용서하지 않든 그건 당사자인 남편이 결정할 일이다. 내가 이리 쉽게 괜찮다는 말을 흘려버리고, 그가 용서받았다고 믿고 편안해지도록 해도 되는 걸까.


당사자의 용서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나는 정말 M을 용서한 걸까. 가벼운 아량이나 과장된 생색으로 용서했다고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용서는 성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니까, 용서 못하는 쩨쩨하고 옹졸한 사람으로 비치는 게 싫으니까, 나도 모르게 용서를 추구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용서하기 전에 진짜 보아야 하는 본질을 오히려 보지 못하고 놓쳐버린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용서를 추구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일종의 가식이다. 용서가 모든 악행이 빚은 불행을 극복하게 해 줄 쉬운 해결책이라는 가식, 상처를 치유하려는 사람 모두가 시도할 수 있는 편한 접근법이라는 가식,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다는 가식, 즉 어떤 상황에서든 용서에 반대할 만한 도덕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가식이다.

이브 제럴드 / 데이비드 맥노튼 <용서> 중


우연히 마주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건넸다고 해서, 지속적인 고통과 손해를 준 가해자의 책임이 간단히 벗겨지지 않는다. 그 말에 담긴 진심이 어느 정도인지, 그동안 얼마나 책임감을 느꼈는지, 내면에 어떤 변화가 실제 있었는지 알 수 없는데, 너무 쉽게 용서한다고 말해버리는 건 우월감과 미덕을 과시하는 가식일 수 있다. 똑같이 자식 키우는 처지에 어린애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하라고 가르쳐 주던 M은 망종이고, 그런 M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나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막연한 영웅심과 자만감. 물론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 없지만, 의식 아래 얼마든지 그런 마음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걸 깨닫고 소름 끼쳤다.


용서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


용서는 결코 쉽게 여겨지거나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용서를 추구하거나, 강요하거나, 설득하려 하면 본질을 놓치지 쉽다. 용서는 가벼운 아량이나 생색을 훨씬 뛰어넘어 가해자를 공감하고 너그럽게 감싸 덮어주는 속 깊은 마음이다. 스스로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이 꼭 함께 해야 한다.


용서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 필요한 만큼의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때로는 수십 년, 아니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나 책임을 지고 관계 회복을 위해 자발적으로 노력하도록 결심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피해자 역시 자신의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것을 치유하는 시간, 동시에 가해자의 입장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용서는 절대 강요하면 안 된다. 용서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진정한 용서도 할 수 있다. 용서를 꼭 해야 할 의무로 생각하는 순간, 용서는 왜곡된다. 부당한 상처를 받았던 기억을 잊거나 묵인하고, 가해자에 대한 건강한 분노마저 억누르게 된다. 용서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지속적인 악을 용인하는 건 정의를 무시하고 자비만 지나치게 강조해 균형감각을 깨뜨리게 된다. 특히 가해 행위가 지속되거나 가해자가 진심 어린 뉘우침을 보이지 않을 때,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건 피해자를 더욱 깊은 고통 가운데 밀어 넣는다. 


성급하고 섣부른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더 힘들게 할 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용서를 서두르는 것도 상처를 덧나게 해 치유와 회복 기간을 더 길게 만든다. 어떤 피해자가 성급하게 용서를 말하려 할 때, 우리는 너무 이르다고 말려줄 수 있어야 한다. 성급하고 섣부른 용서는 피해자 자신을 더 힘들게 할 뿐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가해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뉘우칠 기회를 놓치고 자신이 저지른 악행과 가해를 너무 가볍게 여기게 될 수도 있으니까.


용서 자체가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용서하려는 마음을 가지려고 꼭 노력해야 하는 걸까. 한나 아렌트는 '불가역성의 곤경으로부터 헤쳐 나오게 해 줄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고, 리처드 홀로웨이는 '과거의 쳇바퀴'에서 놓여나게 해주는 것이며, 데스몬드 투투는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라고 했듯이, 용서는 매우 어렵고 때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용서는 처절한 몸부림,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 이루 다 헤아리지 못할 깊은 번민과 고뇌와 갈등의 결과다. 하지만 자아의 안팎에서 선악과 끈질기게 겨루고 난 후의 용서는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버너딘 비숍 <범죄의 얼굴> 중


용서를 해야 피해자도 비로소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용서는 절대 강요되어서도 안 되고, 서둘러서도 안 되지만, 용서를 해야 피해자도 비로소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용서하지 못하고 평생 가해자를 원망하고 분노하며 복수의 칼을 갈며 살아간다는 건 가해자에게 받은 상처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는 건데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가해자가 지어놓은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고 꼼짝 못 하고 사는 거니까. 분노와 복수, 비통함과 원한을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열정, 가해자들에 의해 한계 지워지는 삶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되찾으려는 열정, 가해와 복수의 악순환에서 사랑과 공감의 선순환으로 들어서려는 열정이 결국 용서에 이르게 한다.


절대 당장 용서하라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덧나지 않고 아물 수 있도록 치료해 주는 게 우선이다. 용서는 아주 느리고 깊은 강처럼 천천히 흘러가겠지만, 상처가 아물면 가해자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공감하며 가해자를 인간 대 인간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용서는 절대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니까, 상대의 마음에 가닿는 자리가 분명 있어야 한다. 그렇게 공감하며 조금씩 상대에게 다가갈 때 마음으로부터 용서가 우러나올 수 있다.


용서는 아주 느리고 깊은 강처럼 천천히 흘러가겠지만


당장은 용서할 수 없지만, 상처를 보듬은 후에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조금씩 노력하는 것, 매일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것, 똑같이 되갚아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내 상처를 치유하며 상대를 이해해 보려는 이 느리고 고통스러운 여정이 진정한 용서다. 용서하는 사람은 그 어떤 상처받는 상황에서도 나 자신과 세상을 내던지거나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와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이다.


스스로와 세상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소설미학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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